chapter.10
오늘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처음이었다. 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 말이다.
공황장애를 앓은 지도 어느덧 3년이 되었다. 몇 번 힘을 잃고 쓰러진 적이 있었지만, 오늘처럼 블랙아웃이 된 적은 없었다. 이것은 아마 공황장애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 짐작해 본다. 일 년 가까이 함께 지내던 애인이 한국으로 돌아간 지 열흘이 되었다. 괜찮다고 다독여왔는데, 어쩌면 그 마음이 거짓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가 없는 열흘 동안 잘 먹지도 않았고, 잘 자지도 못했다. 나는 런던 킹스크로스역 15분 거리에 위치한 호스텔에 머물고 있고, 이곳은 오늘도 비가 온다.
지독히도 습하다. 그리고 습한 공기속에서 옅게 마리화나 냄새가 난다. 나는 오전 일과 중 하나인 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호스텔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 키의 두배도 넘는 대문을 밀고 들어간다. 그리고 지린내나는 골목을 한참 들어가야 하는데, 나는 매번 그 골목을 지나갈 때마다 역겨운 냄새에 숨을 참고 골목을 뛰어 들어갔다.
오늘은 불량해 보이는 몇몇의 청소년들이 무리 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위아래로 흘끔거리며 쳐다보는데 혹여나 시비라도 걸까 봐 눈도 마주치지 않고 호스텔 안으로 숨을 헐떡거리며 들어왔다. 그때,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고, 나는 어디라도 앉아야 할 것 같았기에 스스로를 보호하며 쉴 수 있는 로비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때 발에 무언가 치였다.
‘청소 중’
숨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차올랐다. 그리고 방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초조하게 머리 위 숫자만을 쳐다봤다. 2층⋯3층⋯그리고⋯
1초가 100년 같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기억을 잃었다. 로비의 중앙에 누워있었다. 눈을 떴을 때, 잠시 여기가 어딘지 생각했지만, 눈앞에 남자의 옷에서 나는 마리화나 냄새를 맡곤 ‘여기 런던이구나’를 생각했다. 주변엔 사람들이 모여 나의 팔과 다리를 주물렀다. 그리고 앰뷸런스를 불러줄까 물어보는데, 나는 움직이지 않는 얼굴 근육을 최대한 움직여 “no”라고 말했다. 런던의 병원비는 이미 소문으로 들어 익히 알고 있다. 더군다나 앰뷸런스라도 타는 날엔 주머니에 돈뿐만이 아닌, 한국에 있는 내 저금통까지도 모두 병원에 헌납할 수 있다. 나는 밥은 먹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며 둘러댔다. 사람들은 내가 몸을 일으키자 괜찮지 않다면 언제든지 프런트에 이야기해달라며 자리를 떠났고, 나는 로비의 당구대 앞 소파에 기대 눈을 잠시 감았다.
누군가 나를 건든다. 팔을 주무르는 것 같다. 나는 눈을 떴다. 주변엔 두 명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한 명의 여자가 팔을 주무르고 있다. 괜찮냐고 묻는다. 그리고 한 명은 물을 건네고 한 명은 빵과 햄 몇 장, 치즈를 건넨다. 내가 대충 둘러대려고 한 말이 거한 음식으로 돌아왔다. 괜찮다고 이야기했지만, 작은 아시안 여자애의 비실거림이 안쓰러웠는지 측은한 표정으로 음식을 자꾸만 들이민다. ‘thank you’라고 짧은 말을 남기고는 나는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침대에 누웠다. 이대로 정신을 놓아버릴까 봐, 아무도 내가 쓰러진걸 모를까 봐 그래서 내가 죽어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일기장을 폈다. 그리고 지금을 남긴다.
딱히 이곳이 내가 죽고 싶은 곳은 아니지만 자유로운 히피로서 세상을 떠돌다 죽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곳이 이곳이라면 그래 여기서 숨이 멎는 것도 괜찮다. 갑자기 이 모든 것이 명예로운 훈장과 같이 느껴졌다. 나는 지난 여행들을 돌아보던 중 최근 일주일간 일기 속에서 내가 일주일간 쓴 돈이 30파운드가 안 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무리 테이크아웃으로 먹는다고 해도 비싼 이곳의 물가에서 8파운드 아래의 음식은 빵과 카푸치노밖에 없다. 내가 만약 죽으면, 이 일기는 내 마지막을 보여줄 텐데, 내가 매일 먹은 것이 빵과 카푸치노였다는 것을 엄마가 알면 얼마나 슬플까.
휴대폰의 지도를 켜고 근처에 갈만한 곳을 찾다가 극장을 발견했다. 아폴로빅토리아극장. 그곳에선 뮤지컬 위키드가 한다. 24.5파운드다. 나에겐 적은 금액이 아니지만, 뮤지컬의 고장 영국에서는 절대 비싼 금액이 아니다. 이곳에서 뮤지컬 하나도 보지 못하고 이렇게 끝이 날수도 있다 생각하니 너무나 억울했다. 그래서 나는 뮤지컬을 예매했다. 오늘 저녁 7시 30분에 시작하는 공연이고, 가는데 넉넉잡아 1시간을 잡고, 2시간 뒤에는 나가야 한다. 그전에 밥을 먹어야 할 텐데⋯ 오늘은 돈을 아끼지 않겠다. 근처 한식집에서 청국장 한 그릇을 15파운드를 주고 먹을 것이고 24.5파운드의 뮤지컬을 봐야겠다. 그리고 죽는다면 조금은 덜 억울할 것만 같다.
Thursday 11-Jan-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