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2
집이 없는 상태로의 6년간의 기록.
내가 집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내가 히피가 된 이야기.
히피에세이를 씁니다.
Another chapter to our story.
챈커(CHAENKER)입니다.
나는 그리스 아테네에 있었다. 아테네는 우중충하고 싸늘한 분위기에 유독 기분이 나쁜 도시다. 나라가 기우는 것이 구걸하는 시민들의 얼굴색으로 부터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것들과 상반 된 아름다운 신전들과 소설 같은 신화이야기는 더욱 아름다웠고, 그와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은 더 커졌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읽었던 그리스로마신화 그 현장에 내가 있다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꼭 제우스가 눈앞에서 뺨을 쓰다듬으며, “아가씨, 오늘시간 어때?” 할 것 같은 기분이랄까.(내 기억에는 ‘신들의 왕’ 이라는 이미지보다 싸구려 변태 아저씨의 이미지가 더 크다) 여하튼 그 꿈같은 신전이 있던 언덕 아래에는 저렴한 호스텔이 가득 찬 을씨년스러운 골목들이 있다. 그곳의 노숙자들은 다행스럽게도(?) 나를 빼놓지 않고 구걸을 했다. 기분이 이상하게도 좋았다. 파리에서 지낼 때에는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마음대로 팔찌를 채워놓고 강매하기로 유명한 몽마르뜨 언덕에서도, 맛 만보라고 와인을 주곤 돈을 빼앗기로 유명한 에펠탑 앞에서도 내 옆, 내 앞, 내 뒤 사람들은 모두 당하는데 나에게는 다가오기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가난해 보였나 싶은 마음에 괜스레 서운하기 까지 했는데,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나는 털어도 1센트조차 나오지 않게 생겼다. 없어 보이는 데에다가 발 냄새까지 나는 그냥 ‘백패커(begpacker처럼 생긴 backpacker)’였다.
한국은 지금 겨울이다. 하지만 나는 아테네를 지나 터키로 왔고 여긴 한국의 늦여름정도로 정오에는 햇볕이 뜨겁지만, 해가지고나면 서늘히 시원하다. 지금 카카오톡 채팅방에는 눈이 내리는데, 이곳은 여전히 후덥지근하니 휴대폰 속 눈 내리는 카카오톡이 스노우볼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한국이 내가 있는 곳과 그저 다른 나라가 아닌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그 다른 세계로 돌아갈 날이 몇 주 남지 않았다. 이 세계로 온지 일 년 반 만이다. 오래 여행을 하다보면, 슬럼프가 온다. 한국으로 돌아가 적응을 하는 것이 걱정된다는 것 보다 그 세계에서 속해있지 않던 1년 반의 시간을 어떻게 메꿀 것인가에서 오는 상실감일지 모른다. 나는 그 상실감이 너무나 두려웠다. 그래서 다른 세계로 돌아가기도 전에, 또 다른 세계로 나가버리는 편도 행 티켓을 예매해 버렸다.
내게 여행의 의미를 묻는다면, “젊을 때하지 언제해요”라며 가볍게 넘기곤 한다. 하지만 사실 내게도 답답한 속사정은 있다. 여행은 내게 가장 쉬운 핑계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적이며 극도로 소극적이여 남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힘든 내게, 세렝게티 가젤 무리에서 동떨어져 잡아먹힐 것이 뻔한 내게, 가장 쉽게 합리화 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이 여행이었다. 나는 여행이라는 것을 선택 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썼다. 그렇게 5년째가 되는 해이다.
오늘은 자꾸만 이 여행이 후회가 될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여행의 의미를 다시 써내려가며, 나의 선택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하려고 한다. 계속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 세계로 돌아가기엔 나는 여전히 무리에서 벗어나있고, 홀로 싸울 힘은 없기에.
여행을 시작 하고 나서부턴 의도치 않게 불효를 한다. 인도에서는 이단교회에 잡혀 3개월을 꼼짝하지 못하고, 영국에선 엘리베이터 안에서 탈진으로 쓰러지고, 몰타에선 알 수 없는 병으로 입원에, 엠뷸런스를 타고 큰 병원까지. 고조섬에선 더위에 기절도 하고, 스페인에선 도둑을 만나 맞짱을 뜨고, 루마니아에서는 전 재산을 잃어버리고 불가리아에서는 새벽3시 길을 잃어 경찰에 도움을 받는. 그렇게 나는 수도 없는 곤경에 빠졌다. 그럴 때 마다 가족이 미치도록 그리울 때가 있지만, 이 여행은 내 선택이기에 어떠한 부담과 걱정도 줄 수 없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두려움과 상실감에 못 이겨 어제는 시차에 맞추어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곧이어 무뚝뚝하고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 왜”
엄마는 내 전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어릴 적부터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이야기를 줄 곧 해왔기 때문이다. 그건 내게 뿐만이 아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랬다. 얼마나 무뚝뚝한지 역시 경상도여자구나 싶었다. 여하튼 우린 여느 모녀들처럼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잘 지내는 것이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전부이기도 했으며, 사실상 이 시기에 전화를 하면 아주 좋지 않았기 때문도 있었다. 내가 태어난 달이 지나갈 때쯤, 매년 엄마는 투정을 부렸다. 내가 태어난 달이 지나면 머리카락이 빠진단다. 지금까지 줄곧 그랬고, 그렇게 25년 동안 그랬다. “아이고 가스나야 내가 니 땜시 머리카락 다 빠진데” 결론은 빠진 머리카락을 돈으로 보상하라는 뜻이다. (나를 낳은 후유증을 25년째 운운한다.) 그토록 징징대는 엄마 때문에 나는 한겨울이 되면 항상 돈 몇 푼을 엄마 손에 쥐어 주곤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한국에 가면 돈을 또 다시 지불하러 가야한다. 그놈의 머리카락. 이번에도 엄마는 그랬다. 여느 겨울처럼 똑같이 굴었다.
“가스나야 엄마 머리카락 어쩔 거야? 그 때매 전화했나?”
장난인걸 알지만 장난처럼 받아드리지 못하는 건 내 슬럼프가 무척이나 힘들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만 좀 해라 엄마 이제 곧 나 집에 간다고. 내가 몇 년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나? 내 이야기 들으면 히끄득 자빠질껄. 엄마한텐 정말 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외로웠다고."
"어마마 얘 좀봐래이- 웃기네. 니가 선택한거제."
"응 안다 안다고… 그냥 그랬다고 너무 힘들었다고…그냥 우리 딸내미 많이 힘들었나 하면 안되나?“
눈이 눈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너는 젊은 날에 후회는 없제 그체? 엄만 얼마나 숨죽여 울은 줄 아나?"
항상 활기차고 씩씩한 엄마의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아 말을 이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러더니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엄마 바빠 나중에 통화하자"
나는 엄마를 안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울었을지.
2014년 내 20살의 일기에는 그런 내용이 있다.
먼 훗날 내가 엄마가 되어 나의 아이가 엄마의 스무 살은 어땠느냐며 물을 때,
김칫국물 묻은 앞치마를 둘러맨 나는 아이를 앞에 앉히고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떠들고 싶다.
엄마의 스무 살은 최선을 다해 누군가를 만났고 사랑했고 즐거워했고 울었고,
세상은 넓고 너도 그 넓은 세상 속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보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각도를 1도만 틀어도 방향은 달라진다고
눈앞의 작은 세상에 빠져 절망도 슬퍼도 하지 말라고.
그것은 내 인생의 목표였다. 인생은 돌고 돌기 때문이다. 그렇게 동그라미 원 같이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어있다.
엄마의 엄마는 엄마를 낳았고 아빠 손에 엄마의 손을 쥐여 줬다. 엄마는 나를 낳았고 엄마의 아기였던 나는 세상에 섰다. 또 누군가의 손에 내 손은 쥐여 질 테고, 나는 내 아이를 낳아 그 아이의 엄마가 될 것이다. 그렇게 인생은 돌고 도는 거니까.
나는 세상이 도는 방향대로 돌고 싶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제시카는 내가 우울에 빠져있을 때마다 그런 말을 한다. “인생의 모양은 지구의 모양과 같아 둥근모양이지. 뾰족하게 느끼는 건 단순히 너의 감각 탓이야.” 나는 아이를 지키는 울타리 말고 살면서 위험을 마주하고 즐기는 방법과 세상속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고 싶다. 지금 내가 배우는 세상처럼. 나는 완벽하지 않다. 잘난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나 하나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도 안다. 하지만 세상은 돌고 돌 테니까. 내가 느낀 아름다움을 전한다면 그것도 함께 돌 테니.
그것이 새로이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의미이다. 변화의 시작. 나부터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 세상이 도는 방향으로 나의 진심을 전하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아테네를 떠나 터키를 거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이유이고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용감하게 배낭을 멘다. 모든 것은 하나의 동그라미이고 원점은 허무한 것만이 아니다.
그러니 아주 잘 하고 있다. 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