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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마지막편-돌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도착한 것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는, 어디에도 없었던 나는

by 채박




첫만남 이후

첫만남 이후 그는 재빠르게 애프터 약속을 잡았다. 오늘 봤는데 내일 또 보자고 했다. 그런 적극적인 면이 나를 설레게 했지만 나는 일에 쫓기지 않고 여유있게 보고싶어 금요일로 미루자고 했다. 같은 도시에 살면서 3일 씩이나 못 볼 이유가 뭐냐면서도 내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그렇게 약속은 금요일로 미뤄졌고 우리의 '미니 장거리 연애'가 시작되었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그는 퇴근 후 매일 페이스타임을 걸었다. 삼십 대 직장인들 연애에서 이런 적극적인 연락이라니. 이 또래 남자의 레이더는 보통 커리어와 자기 자신에 맞춰져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진짜 이런 남자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에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우리는 화면 너머로 서로의 하루를 공유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다.


첫만남 + 4일 째

드디어 첫 정식 데이트인 금요일 오후, 우리는 파리 9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버사이즈 핏의 재킷과 통바지, 그리고 자연스러운 메이크업까지 오랜만에 풀세팅을 했다. 약속장소로 향하는데 초저녁의 상쾌한 공기가 살짝 긴장감을 주었다. 우리는 힙하다고 하는 베트남 식당을 선택했고, 식전주로 칵테일을 주문했다. 바질과 시트러스 향이 어우러진 칵테일 한 모금에 긴장됐던 어깨가 스르륵 풀렸다. 낯선 사람 앞에서 어색함이 풀릴 때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 성격인 내가, 겨우 한번 본 남자 앞에서 긴장이 풀리다니. 매일 화면 너머로 한두 시간 동안 일상을 공유해서인지 그가 전혀 낯설지 않고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오래된 연인처럼 대화는 자연스러웠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의 수다가 즐거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웃고 떠들었다. 다시 본 그는 공원 앞에서 환하게 웃던 모습 그대로 여전히 멋있었고, 그날 밤 우리는 달콤한 첫 키스를 나누었다.


첫만남 + 6일 째

만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그 주 주말 내내, 우린 함께 시간을 보냈다. 토요일엔 처음 만났던 공원에서 피크닉을 즐겼다. 돗자리에 누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대화하는 여유도 부렸다. 그리고 첫 만남 이틀 전, 서로를 모른 채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 두 번씩이나 우연이 겹치다니 신기했다. 하물며 그는 중고 카메라를 사기 위해 내가 사는 동네에 처음 왔다고 했다. 둘 다 단지 날씨가 좋아 이 공원을 산책했다니... 우연이 겹치면서 우린 더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함께 걸으며 대화 하던 중 그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미세한 긴장감이 온 몸을 감쌌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꼭 잡은 손에 편안함이 느껴졌고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그에게 내 마음이 조금씩 기울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시 보고 싶다"가 아니라, "계속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빠르게 연인이 되었다.


첫만남 + 5년 후 지금

시간이 흘러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반려자가 되었다. 가끔 생각한다. 7년 전, 나는 왜 다시 파리를 선택했을까. 돌고 돌아 여기에 왔고 그를 만났다. 운명 같은 말은 믿지 않지만, 어쩌면 뭔가에 이끌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도착한 것은 아닐까?


유로스타에서 카트를 밀던 여름, 구직하기 위해 불안을 삼키던 시간들, 세든 집에서 쫓겨나 고생한 추운 겨울. 그 속에서 나는 다음이 무엇일지 몰라 이번 한고비만 넘기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려 노력했었다. 나를 무너뜨릴 것 같던 순간들 사이로, 별빛처럼 빛나던 소소한 행복들이 내 발걸음을 여기까지 이끌어주었다. 그리고 그 위에 어디에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 하나가 더해졌다. 여전히 모든 게 완벽하진 않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파리에서 겪었던 시간들이, 돌아갈 곳을 찾는 여정이 아니라 머물 곳에 정착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는, 어디에도 없었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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