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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린 Mar 28. 2022

국적보다 진한 정체성의 향기

내가 네덜란드에 온 지 얼마나 되었더라? 기념일이란 것을 좋아하던 시절에는 처음 입국했던 날짜가 돌아올 때마다 "올해로 몇 년째" 하며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갔었는데, 열 손가락을 다 접어 발가락까지 동원해야 했던 그때부터 아마 나는 세는 것을 멈췄던 것 같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왜 내가 네덜란드라는 나라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한국보다 네덜란드에서 사는 것이 더 좋은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같은 질문을 수도 없이 듣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녹음된 테이프처럼 “네덜란드에서는 스트레스가 덜해서요"와 같은 평이하고 듣기 좋은 대답을 내놓고는 했지만, 사실 17년이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많은 고민과 생각의 변화가 있었다.


나는 고3이 시작되던 3월 6일, 한국의 입시 지옥을 벗어나 네덜란드에 오게 되었다. 처음 1년은 모든 게 신나고 좋았다. 일단 한국 고등학교 과정에 비하면 하루하루가 주말 그 자체인 국제학교 생활은 하이틴 드라마를 살아가는 느낌이었고, 언어장벽이고 뭐고 일단 수능이 없다는 데에 행복했다. 하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대부분의 환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일단 이곳의 날씨가 큰 몫을 하고, 모든 것이 편리함 그 자체인 한국에 비해 이곳은 모든 게 느리고, 답답하고, 불편하다. 그리고 먹을 것도, 놀 거리도 참 없다. 사는 건 어디나 비슷했고, 이곳의 삶은 또 그만의 고민이 있었으며, 성장통은 어디서나 괴로웠다. 사는 게 어디서나 똑같이 힘들다면, 조금이라도 익숙하고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은 곳에서, 서로의 위로를 받으며 사는 게 차라리 나아 보였다. 한국이 그리웠고 다시 한국에서 살고 싶었다.


그런 내가 네덜란드에서 살고 싶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출국 3년 후 처음으로 한국에 갔을 때였다. 한국의 친구들보다 2년이나 늦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는 성인이 되어 한국에 갔으니 고국 방문은 그 어떤 일보다도 설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반가우면서도 낯설었고, 그토록 그리웠던 내 나라도 익숙하면서도 생소했다. 이전에는 몰랐던, 전혀 느끼지 못했던 모습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걸음걸이에서는 여유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모두 어쩐지 지쳐있었다. 하지만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건 내 나라에서조차 나는 섞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멀리서 인파 속의 나를 보고 한눈에 "외국 살다 온 애”임을 알아차렸다며, 딱히 내 행색이 유럽스럽게 촌스러워서가 아니라 (아마 이게 맞을 테지만) 행동이 왠지 남들과 달라서라는 말을 했을 때, 도대체 지난 3년 동안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나조차도 혼란스러웠다. 약 두 달여간의 그 첫 고국 방문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돌아갈 수 있는 곳, 그리운 내 고향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어느새 맘에 안 드는 것도 많고 마음도 편하지 않은 곳이 되어있었다. 서울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네덜란드어를 들으며 묘한 안정감을 느낄 때, 나는 알 수 있었다. 변한 건 고향이 아니라 나라는 것을.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살면 살수록 살기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느 나라, 어느 문화나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니 네덜란드 또한 장점만 가득한 나라는 아니다. 이들의 지나치리만큼 직설적인 코멘트에 굳은살이 박히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아직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입버릇처럼 “이놈의 나라"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하지만 이들의 이성적인 사고와 성숙한 시민의식, 뛰어난 사회 시스템을 목도할 때마다 나도 그 일부가 되고 싶었다. 특히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사고가 이어지는 한국에 비해 네덜란드는 평화롭고 조용한 나라이지만 가끔 큰 사건이 터질 때 그에 대응하는 정부의 자세와 늘 국민의 안위를 우선에 두는 모습은 존경스러웠다. 내 나라에서 이방인이라 느꼈던 그날부터, 이상에 가까워 보이는 네덜란드 사회에 정착하고 싶어졌다. 돌이켜보면 부끄럽지만, 그즈음의 나는 나에게서 한국인스러움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그들을 동경하고 그들과 융화되려 해도 절대 넘을 수 없는 무형의 벽이 그들과 나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건 오랜 시간을 산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고, 내가 네덜란드 사회에 속해 생활해도 온전한 소속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아무리 내가 부정하려 해도 나는 한국인이었다. 그건 국적보다도 더 진한 정체성의 문제였다. 한국인임을 부정하려 했던 그 시기에도 나는 한국인답게 '빨리빨리'를 선호했고, 여전히 무한도전이 가장 재미있었고, 빵보다는 밥이, 네덜란드의 완두콩 수프보다 김치찌개가 좋았다. 네덜란드는 비교적 이방인의 비율도 높고 그 수용도도 높은 편이라 하지만 그래도 이방인은 이방인이었다. 아무리 내가 네덜란드어를 쓰고 매일같이 네덜란드인과 교류를 하고 지내도 내가 네덜란드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고 그렇게 받아들여지지도 않고 있었다. 오히려 누가 봐도 한국인인데 애써 네덜란드인 행세를 하려는 꼴이 나에게조차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마 그것을 깨달은 것은 10년쯤 지나 네덜란드 국적 취득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던 시점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국적은 단지 서류상의 문제이고 행정적인 의미뿐이며, 네덜란드 국적을 취득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많다고 했지만, 나는 아마 국적이란 게 나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 조국 대한민국과 제2의 고향이 된 네덜란드, 이 두 나라가 나에겐 어떤 의미인지 냉정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어디에서 가장 나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자 놀랍게도 그전에는 단점으로 보였던 것들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도, 네덜란드인도 아닌 어정쩡한 나의 정체성은 오히려 그로 인해 희소성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한국과 네덜란드 두 곳에 존재하며 두 문화와 사회에 동시에 포함되어 있는 건 흔치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로부터 가치를 끌어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어느덧 17년이 지났다. 이 고민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한국인으로서, 특히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매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


지금 누군가가 나에게 왜 한국이 아닌 네덜란드에 살고 있느냐 물어본다면, 솔직히 잘 모르겠다 대답할 것이다. 그저 현재 내 삶이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일 뿐, 내가 어느 곳에 사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단 중요한 것은, 내 세상의 중심은 나이고 내가 어디를 가든 나의 일부분에 한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좋든 싫든 가족은 가족인 것처럼, 내 나라도 좋든 싫든 내 조국이다. 애증, 이 단어만큼 내 나라에 대한 감정을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당분간은 한국에 들어가서 살 계획도 없고 한국 뉴스에는 마음이 갑갑해지는 내용만 가득하지만, 여전히 나는 대한민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고, 네덜란드 국적은 취득할 계획이 없다. 아마 계속해서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정체성을 갖고 살아갈 테지만, 한국 국적을 유지하는 한 내 정체성의 일부가 단점이 참 많지만 그럼에도 격하게 아끼는 내 나라에 있다는 것을 늘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기에 더 아픈, 애증의 내 나라를 나의 정체성의 일부로 겸허히 받아들인다. 



 [2022, 3]


*이 글은 주간 최승연 시즌 1, 6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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