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텔레파시의 ‘결’을 갖고 있을 때

영화 <퀴어> 속 공연하는 리, 관객 유진

by 채리 김

※ <퀴어>(2025) 스포일러 주의 ※


선잠 속 꿈결은 보통의 것과 다르다. 제대로 잠들지 못한 자가 텔레파시를 그토록 갈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리에게는 숙면의 꿈에서 만나는 당신의 모습이 진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꿈이 악몽이라면? 우린 영화를 보는 내내 리의 꿈결을 따라 부유한다.

영화 시작 5분 만에 리는 TV의 노이즈 속으로 사라진다. 친구가 “너무 퀴어라서 싫어.”라고 말하는 대사 위로 리가 멈추고 투명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사라진 리는 계속해서 투명한 신체로써 우리 앞에 나타난다. 유진의 머리칼을 넘겨주는 리의 투명한 손, 장 콕토의 영화를 보며 그의 목덜미를 만지고 향을 맡는 투명한 리. “거울은 거울일 뿐이고, 그 안에는 불행한 남자가 있어요. 이해하려고 하지 마요. 그냥 믿는 수밖에 없어요.” 콕토 영화 속 대사가 영화의 주제를 전달한다.


영화 <퀴어>는 원작 소설의 원형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변함없는 각색을 시도했다. 인물들의 긴 대사는 책 속에 나온 것과 거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시선은? 원작 소설 작가인 윌리엄 버로스는 책의 서문에서, 이것이 굉장히 자전적인 경험의 이야기라고 밝힌다. 그리고 아내 조안을 총으로 쏴 죽인 것으로부터 글쓰기의 동력을 얻은 것이라 고백한다. 트라우마가 시발점이 된 창작은 문장의 결마다 고통과 고뇌가 담겨 있다. 리의 수치심과 죄책감은 말 그대로(literally) 문장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영화 속에서 디테일하고 또 직관적으로 인서트로 보이고 있다.


먼저 인서트가 나열된 영화의 오프닝은 「All Apologies」(원곡 너바나) 노래가 흐른다.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노래.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 말을 들을 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아내 조안), 그에게 필요한 것은 ‘텔레파시’다. 그리고 현실에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는 자신을 봐줄 관객이 필요하다. 그가 바로 유진이다.

유진이 리의 관객임을 알 수 있는 지점은 바로 감독이 그려내는 대화의 방식이다. 친구 기드리와의 대화에서는 리가 충분히 상호적이다. 수다스러운 기드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순서대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유진과의 대화에서는 거의 리의 독백뿐이다. 아주 연극적인 그의 몸짓, 길고 긴 이야기. 그 모든 걸 가만히 지켜보고 듣고 있는 유진. 이것이 간절하고 비참한 리의 공연을 보고 있는 유진의 시선이다. 리는 유진을 멀리서 바라본다. 카메라는 리의 시선으로 유진의 육체를 훑지 않는다. 관객의 몸을 훑는 배우는 없듯이, 유진의 반응을 살필 뿐이다.


인서트는 인물이 아닌, 공간, 사물 등을 찍은 숏을 일컫는다. 영화 속에서 인서트는 보통 시점 숏이거나 아닌 경우 둘 중 하나이다. 인물이 보고 있는 시점(point of view) 카메라의 방식으로 된 인물 숏, 혹은 아예 영화 속 인물은 볼 수 없는, 관객만이 확인하는 인서트 숏이 있다.


전자는 원작 작가가 직접 언급했듯, ‘리는 관객을 필요로 한다. 관객은 유진인 것이다.’ 그래서 영화 초반부, 유진의 시선을 끌기 위한 리의 공연이 펼쳐진다. 그것을 보는 유진의 시점 숏이 인서트로 활용된다. 유진이 리의 방 안에 처음 입장했을 때, 그는 주변 사물을 둘러본다. 안경, 총집, 소파 등등… 이것은 모두 리가 준비한 소품들이다. 소설 속에서도 역시 ‘리의 방은 조촐하니, 사람이 살지 않는 방 같았다.’라는 문장이 있다.


또한, 리의 시점 숏은 필연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원작이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 문법을 갖고 있더라도, 결국 ‘리’ 본인의 자기 고백적 서사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리를 중심으로 서사가 흘러가며, 그가 보고 듣는 것이, 판단하는 것이 곧 관객의 것과 연결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후자, 즉, 관객만이 확인하는 인서트이다. 나는 그러한 인서트들이 영화가 관객과 텔레파시를 시도한다고 생각하였다. 리도, 유진도 아닌, 오롯이 시네마와 관객만이 주고받는 눈짓들, 생각들. 이 영화를 통째로 리의 선잠 속 꿈이라고 본다면, 그리고 마지막 시퀀스가 리의 악몽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린 그 꿈 안에서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텔레파시가 가능해진다.


둘의 첫 섹스에서, 침대에서 떨어지는 안경, 욕실의 담배, 창문 숏은 모두 리도 유진도 보고 있지 않은 인서트다. 리의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 카메라는 왜 다른 곳으로 튀는 것일까. 그건 이것이 ‘섹스’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리가 유진에게 해주는 블로우잡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나는 카메라가 이토록 집요하게 공간을 응시하는 순간이, 리의 욕망보다는 ‘관객으로서의 의무’를 환기시키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섹스가 아니라 리와 유진을 가둔 이 공간 자체가 관계를 대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수중에서 떠도는 듯한 메인 테마곡은 우릴 다시 선잠의 결로 이끈다.


감독은 무조건 세트 촬영을 고집했다. 리와 유진을 십 아호이에, 그 거리에 가둬 버린 것이다. 카메라는 씬이 바뀔 때마다 붐다운을 하며 동네를 조망한다. 올해 멕시코에 갔을 때 길거리에 개들이 많았다. “멕시코 개들은 아주 시들하거나 너무 뚱뚱(chubby)하거나 둘 중 하나야.” 친구가 말했다. 길거리 개의 디테일까지 감독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영화 속의 공간을 창조해 낸다.


섹스 이후, 리의 진짜 ‘욕망’이 소개된다. ‘야헤’와 ‘텔레파시’ 둘은 섹스가 끝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바로 그다음 날 이것들을 이야기하는 리의 목소리가 오프사운드로 침입한다. 그렇다. 이것은 늙은 남자의 젊은 사내에 대한 추한 욕망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에 대한 구걸, 한없이 서리기만 한 고독, 죄책감과 자기혐오로 점철된 리는 계속해서 사라진다. 우리는 이제 야헤를 찾으러 떠난 리를 찾는 여행을 시작한다.


칼을 가는 남자가 있다. 울고 있는 죽은 아기, 죄수복을 입은 퀴어들, 그리고 유진이 리를 쳐다본다. 리의 꿈은 계속된다. 여성의 나체 토르소를 만지는 리의 시점 숏. “당신 퀴어 아니야?” 그녀가 묻는다. “난 퀴어가 아니야.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거야.” 리는 리 자신을 부정한다. 지네가 타고 오르는 잘린 발목만이 덩그러니 남는다. 정신을 신체에서 분리하려 할수록 신체는 조각난다. 와해되는 악몽은 우리를 리와의 텔레파시로부터 차단하고, 그의 감정을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리는 유진에게 남미로 가자는 제안을 한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리는 마약을 한다. 관객은 3분 남짓 동안 리의 식탁 앞에 앉아 그가 마약을 제조하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 카메라는 틸트업(tilt-up)하며 마약에 빠진 그를 보여준다. 우리는 마약에 취한 얼굴을 보며 다시 그와의 텔레파시를 시도한다.

불행하게도, 여행을 떠난 리는 마약(아편)을 구하기가 어려워진다. 에콰도르로 가는 내내 그는 금단 증상에 시달린다. 극도로 추위에 시달리는 리의 다리 위에 자신의 다리를 얹는 유진. 리는 마침내 마약 없이도 꿈속으로 겨우 접속한다. 종이 한 장이 리와 유진 사이에 놓여 있다. 숨결을 따라 흔들리는 종이는, 그들 사이의 밀어지고 당겨지는 관계를 대변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유진이 리의 공연 속 충실한 관객 역할을 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아침을 먹던 유진이 접근하는 리를 밀치자, 자기혐오로 똘똘 뭉친 리가 금단 현상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왜 그런 역겨운 얘기를 하는 거야? 어디 안 보이는 데 가서 해결하고 오면 안 되는 거야?” 자신의 공연이 망쳐지는 순간,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는다.


감독은 대놓고 힌트를 준다. 야헤를 찾는 리에게 키토의 한 박사가 묻는다. “누구랑 소통을 하고 싶어서 찾는 거요? 당신 아내?” 그는 코터 박사를 리에게 소개해준다. “야헤는 어딘가로 가는 문이 아닙니다. 거울 같은 것이죠.” 거울을 들여다봐야 하는 리. 그의 우매하고도 서글픈 욕망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마침내 야헤를 한 리와 유진은 신체에서 신체를 내뱉는다. 풍선껌같이 부풀다가 떨어지는 두 개의 심장. 그의 신체는 사라진다. 사라짐으로써 우리 앞에 나타난다. 와해됨이 아닌,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것뿐이다. 유진과도 배우와 관객이 아닌, 두 명의 남성이 되어 춤을 춘다. 서로를 껴안고, 뭉쳐진다. 달라붙는다. 감독은 그로테스크를 통해 이 둘의 진정한 소통의 방식을 보여준다. 리의 인생에서 텔레파시가 필요 없어지는 순간이다.

유진은 사라진다. 리는 추락한다. 그는 홀로 잠에 들며 눈물을 흘린다. 선잠의 결을 따라 꾸는 꿈이 아닌, 드디어 제대로 된 악몽. 붉은 복도. 리가 걸어온다. 창밖으로는 리의 눈동자가 크게 그를 지켜보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 꼬리를 먹고 있는 붉은 뱀이 울고 있다. 유진은 침대에 유리 상판 아래 깔려 누워 있고, 그의 목에서 움직이는 지네 목걸이. 뱀은 사라지고, 유진이 침대 위에 앉아 있다. 그는 머리 위에 컵을 올려놓는다. 리는 총을 꺼내 컵이 아닌 유진의 이마를 맞춘다. 바로 윌리엄 버로스가 아내 조안에게 그랬던 것처럼. 리는 더 이상 관객과 텔레파시 하기를 그만둔다. 텅 빈 방. 그는 사라지고, 정말로,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다.


다 늙은 리는 홀로 모텔방에서 잠에 든다. 그는 죽을 때까지 고통받았다.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는 고스란히 그것을 보여준다. 그를 감싸는 건 유진의 다리. 카메라는 조각난 기억을 조각난 신체로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잠에 드는 것은 결국 죽음. 평화는 죽음에 다다라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이었나.


영화는 후반부부터 소설과 아예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소설에서는 결국 야헤를 찾는 것에 실패하면서 끝이 난다. 그렇다면 영화가 더 나아가고 싶었던 지점은 과연 무엇일까. 감독은 리에게 연민을 품고 있다. 자기 연민이 아닌 동정으로서, 결국 채워지지 않은 인물의 욕망을 스크린으로 구현해 주는 시네마의 자선.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을 넘어, 결국 ‘관객과 인물 사이의 텔레파시 가능성’을 실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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