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 P 부부는 언제나 용감하다
작년 무렵, 내년 여름쯤 기회가 되면 독일에 다녀오면 어떻겠냐고 남편이 제안했다. 없는 기회를 만들어 여행하는 타입은 아니기에 먼저 장거리 여행을 계획하는 일이 드물지만, 누군가가 먼저 여행 제안을 해 오는 것은 언제나 반가운 즉흥형 인간.
"가게 되면 좋지. 그런데 어린아이를 데리고 그 멀리까지 다녀올 수 있을까?"
그리고 찾아온 올해 여름. 머릿속에 예상하던 여행 적격 시기인 7월이 오자, 남편은 좀 더 적극적으로 물었고 우리는 고민 끝에 21개월 아이와 셋이 독일로 떠날 것을 다짐했다. 결정에는 시일이 걸렸지만, 결정하고 나니 여행 준비에 속도가 붙었다. 정확히 말하면 워낙 여유 없이 결정하다 보니 딴청 부릴 시간이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그 요인 중 하나, 희망 출국일 8일 전에 내 여권이 만료되었다는 것과 우리 아기는 여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허허허) 그 즉시 시청으로 달려가 여권 신청을 했고, 주말 포함 5일 뒤에 안전하게 수령할 수 있었다. (Tip. 여권이 급한 분들은 방문 수령 말고 우편 수령으로 신청하세요!) 그리고 여행 이틀 전에 비행기 티켓을 결제하고, 하루 전에 숙소와 기차표를 예약했다.(혹시 미리 하면 병나는 병에 걸렸나요? "네." )
뭐 이러한 경우야 흔하니까 당황할 일 없는데, 문제는 어린아이와 첫 해외여행이라는 점. 그것도 지구 반대편 유럽! 우리 부부의 짐을 대충 싸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의 짐은 제대로 챙겨야 여행지에서 당황할 일이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만큼 아이 짐을 꼼꼼히 싸야 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하루 전에 챙기려니 머리도 지끈거리고, 시간도 없고, 체력도 부족해서 꽤나 힘들었다. 나는 내가 MBTI P인 게 개인적으로 너무 좋지만, 가끔은 J의 통제력이 필요할 때가 있다. 가족 구성원 중에 한 명쯤은 J가 있으면 상호보완이 되어 좋을 것 같은데, 남편과 나는 둘 다 극 P인 타입이라 아마 높은 확률로 우리 아이도 P일 테지. 그래도 마음은 참 잘 맞겠다... (땀 삐질)
필요한 것을 사고, 아이 짐 챙기고, 집안을 정리하는 걸로 이미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한 우리 부부는 "이게 여행 준비인지, 벌칙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P 부부인 우리는 "어떻게든 되겠지" 모드로 지내는데, 부모가 되면서 약간의 레벨 업을 했는지 조금은 달라졌다.
"어떻게든 되겠지!" → "어떻게든 되게 만들자!"
안 되는 상황도 좀 더 비중 있게 고려하기 시작. 해결을 위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 보는 성의가 생김. 상황 통제력을 조금은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으로 자체 해석...
주변 상황과 변화에 유연하니 "변수 또한 여행의 재미다!"라며 별 타격을 받지 않아 늘 느긋한 우리. 그런데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은 완전히 다르기에, 출발 전부터 세심하게 챙겼다. 그런 덕에 이른 아침에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소 어떤 삶을 살아온 겁니까? "... 묻지 마세요.")
오랜만에 닿은 공항. 국내선 비행기를 탔던 것을 제외하면, 2023년 1월 이후 2년 반 만이다.
5년 전 1월,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제주도로 대체한 2020년 가을 '임시 신혼여행'의 아쉬움을 풀고자 런던으로 떠났다. 그때 나는 임신임을 막 확인했던 극초기 산모. 상당히 망설였지만, 어렵게 맞춘 휴가인만큼 무리해서라도 떠나고 싶었다. 그렇게 계획에 없던 임신 극초기 해외여행을 가게 되었고, (신체적으로) 생각보다 더 많이 힘든 여행이었지만 그 안에서 충분히 즐거웠으며 예상대로 행복한 추억으로 남았다.
그...런...데... 그때 비행보다 더 힘든 비행이 있을 줄이야.
21개월 아이와의 14시간 비행을 계획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이 말을 해 주고 싶다.
"힘들어요. 정말 힘들어요. 힘들었어요! 괴로웠어요...!!! 그러나 시간은 가더이다..."
이상하게 여행 하루 전부터 유독 더 심한 엄마 껌딱지가 된 우리 아들은 비행 내내 엄마만 찾았다. 정말 엄마만 찾았다. "아빠는 싫다! 가까이 오지 말라!" 거부하면서 오직 엄마만...
"아빠 시!(싫어) 가!"
비행기가 뜨고 2~3시간 정도 지났을까. 앞으로 10시간도 더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어떤 중죄를 지었길래, 이 비행기에 21개월 아이와 함께 몸을 실었지?'
'숱한 경험으로 이 시간 또한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정말 그때가 올까?'
'마법처럼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제발 우주의 기운이여 나를 속여주세요."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안전하게 착륙했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발을 디뎠다.
비행 소감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1. 비행기 안에서 가장 많은 소음을 유발한 것은? 우리 아이. (주변 분들께 너무나 죄송합니다...)
2.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분들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우리 아이. (갑자기 열이 오르는 바람에)
3.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분들에게 가장 예쁨을 받은 사람은? 우리 아이.
4. 비행기 안에서 두 번째로 적게 잔 사람은? 아마도 나. (혹시 몰라 '두 번째'라고... 14시간 동안 1시간 잤을까.)
아이의 투정이 단순히 힘들었다기보다는, 우리의 욕심으로 아이를 힘들게 하고 있는 것 같아 너무 미안했다. 그리고 주변 승객들에게 크고 작은 피로감을 주고 있을 거라는 확신에 마음이 무겁고 죄송했다. 대부분 귀국하는 독일인이나 여행 중인 외국인들 같았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틈틈이 눈짓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저 한국 여자는 자꾸 눈을 이상하게 뜨네?'라고 생각했을지도. 불쌍하게 웃은 거예요. 죄송한 눈인사...
그리고 지금은 독일 기준, 오전 5시 38분. 여행 이튿날 새벽이다. 오늘과 내일은 독일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소도시를 돌아보고, 남은 일정은 베를린에서 보내다가 돌아갈 예정. 이곳에서 밤마다, 이른 새벽마다 원고 작업을 할 계획인데, 부디 나에게 특별하고 생산적인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 아이 컨디션이 나아지길. 예쁜 웃음과 귀엽고 힘찬 걸음걸이를 많이 볼 수 있기를! 함께 고생하고 있는 내 남편도, 아침 컨디션이 좋기를 진심으로 기원! :)
독일 여행 1일 차, 기록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