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그 맛을 찾아서
어느 날, 옆집 양조장에서 놀던 한 때와 그곳에 펼쳐진 술밥 익어가던 시간이 그리워졌다. 그리하여 '시음유랑단'을 꾸려 어릴 적 맛보았던 막걸리를 찾아다녔다. 무작정 찾아간 오래된 양조장, 그 마지막 목적지는 부산하고도 금정산성이다.
꼬불꼬불한 도로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부산 금정산길을 넘어 분지 마을로 들어서니 동네 중간쯤 농악대가 흥겹게 춤추고 있는 금정산성 토산주 양조장의 벽화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16세기 금정산성 축성 때 군졸들이 즐겨 먹던 쌀 술을 전통제조방식 그대로 만드는 곳이다. 일체의 인공재료를 넣지 않는 발효주로 우리 막걸리 중 유일하게 향토민속주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보통의 막걸리는 알코올 도수가 6도지만 전례탁주로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알코올 도수를 8도까지 올릴 수 있는 술을 민속주라 부른다. 입구에 들어서니 계량 한복 차림의 유청길 대표가 “왜 이렇게 늦었냐”며 인사를 건넨다. 그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막걸리 양조 과정을 보려면 오전 시간에 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뿔싸! 대신 옛 양조장 소품들을 모아놓은 막걸리박물관을 방문하기로 했다. 차로 3분쯤 이동하니 조용한 시골 마을 속에 아담하게 자리한 박물관이 눈에 들어왔다. 술을 빚을 때 사용하는 항아리며, 다양한 그릇, 탁주를 배달하던 빈티지 자전거 그리고 금정산성 토산주의 아이덴티티인 누룩 견본들을 둘러봤다. 그제야 이곳을 방문하려던 목적이 떠올랐다. 일제시대에 정착된 쌀이나 밀가루에 균을 뿌리는 ‘입국’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누룩을 빚어 발효시키는 이곳만의 전통 누룩방을 보기 위해서였다.
금정산성 토산주의 누룩은 유청길 대표의 어머니가 명맥을 잇고 있는데 직접 발로 밟아 피자 모양으로 빚는다고 했다. 어머니가 부재 중이라 먼저 시음과 더불어 막걸리와 매칭이 남다르다는 흑염소 불고기를 맛보기 위해 근처 맛집으로 소문난 ‘유대감’으로 이동했다. 한 잔 기울인 금정산성 막걸리의 첫 잔. 신맛이 강하다는 주변 평가와는 달리 시큼함보다 상큼함에 가까운 맛이었다. 단맛이 덜하고 여기다 담백함이 깃들었다고나 할까. 흑염소 불고기는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었다. 접시를 비울 때쯤 염소 치즈의 끝 맛과 비슷한 ‘큼큼함’이 입 안에 감돌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쫄깃하고 맛나다. 식사 시간이 거의 끝날 때쯤 누룩방인 ‘국지향’의 문이 열렸다. 오랜 시간 누룩 반죽할 때 사용해 온 나무받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시 한 번 문이 열리자 동글납작하게 빚어진 누룩들이 가지런히 익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빚으면 두꺼운 바깥쪽이 수분을 오래도록 흡수하고 있어서 안쪽까지 균이 잘 배양돼요.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디자인이죠.” 국지향을 등지고 하산 하던 길, 문득 전통제조방식이든 일본 방식이든 결국 우리 조상의 지혜가 빚은 술이 막걸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그 맛을 찾기는 힘들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 대신 향수를 채워줄 신선한 경험을 했으니 꽤 값진 여행이었다. ▒
금정산성 토산주 051-517-0202,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554-1번지.
(사진 설명)
1 막걸리박물관은 산성마을의 평온한 시골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한 잔 술이 땡기는 막걸리 누각과 항아리. 2 예전에 막걸리 상자들을 실어 나르던 빈티지 자전거.
3 박물관의 오래된 소품들은 옆 건물로 이어진다.
4 피자 모양의 누룩을 들고 선 금정산성 토산주의 유청길 대표. 이곳에서 누룩을 머리에 이고 저 멀리 동래, 구포 시장으로 향하는 아낙들의 오래된 사진도 볼 수 있다.
5 누룩방 ‘국지향’에는 우리 조상의 지혜가 담긴 누룩이 몽글몽글 배양되고 있다.
6 상큼한 맛이 인상적인 ‘금정산성 생 막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