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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소장 May 12. 2018

위스키, 천천히 드링크

Drink Slowly

패션만큼 술 트렌드도 돌고 돈다. 자신의 취향을 찾으려면 패션은 입어보고 술은 마셔봐야 한다. 요즘은 시간을 들여 즐기는 '싱글몰트 위스키'가 대세다.



몇 해 전, 록 페스티벌에서 만난 그와의 재회는 가로수길의 퓨전 쌈밥집에서 이뤄졌다. 외국인에게 새로운 한국식 먹거리를 제안하려 했던 나의 의도는 주방장의 컨디션 난조로 ‘떡밥’으로 서비스된 메뉴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으니 대신 대화로 쌈을 싸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고등학교와 대학교 학생증, 가족과 친구 사진이 들어 있는 카메라를 준비물로 들고 온 그는 자신의 과거를 브리핑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비로소 그가 켄터키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켄터키라고 들어봤어?” “켄터키 프라이드?” “응, 그리고 ‘짐빔’의 도시.” 켄터키 사람에게 짐빔은 시골 출신이라는 자격지심을 면피하는 키워드인 듯했다. 분명 ‘우리 동네는 사과가 유명해’보단 글로벌한 이슈였다. 짐빔이라면 영화 <칵테일>에서 톰 크루즈의 손에 들려 있던 미국의 대표적 버번 위스키다. 생각해 보니 내 경우엔 옥수수를 주재료로 보리, 귀리, 밀 등을 사용해 만들고 짙은 바닐라 향이 특징인 아메리칸 위스키 중 짐빔보단 미국 남북전쟁 때 북군에게 제공돼 마초의 이미지를 입은 테네시 위스키 잭 다니엘과 좀 더 친했던 것 같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슬레이드 중령은 장소 불문하고 잭 다니엘을 줄곧 언더록으로 즐겼지만 대학 시절, 철없던 우리는 콜라와 섞은 ‘잭콕’을(맥주, 소주, 막걸리 다음으로) 종종 마셨다. 이 철 지난 에피소드의 키워드는 라이언 필립을 닮은 잘생긴 켄터키 청년보단 콜라일지도 모르겠다. 알코올 도수 40도를 웃도는 위스키라는 술은 풋풋했던 우리들이 들이키기엔 너무 독하고도 젠체하는 술이었으니 언제나 섞어 마실 뭔가를 찾아야만 했다. 

우리 어르신들 역시 위스키를 품위 있게 즐기는데 인색하다는 사실을 안 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지하 세계’에서 소비되는 유통량이 전체 판매량의 90%를 웃도는 위스키의 한국적 소비 패턴은 오랜 시간 숙성된 술의 맛과 향을 모독하는 ‘원샷’과 레시피 없이 잘 말아 ‘부어라, 마셔라’ 하는 이미지로 각인돼 왔고, 뼈대 있는 스카치 위스키 브랜드의 메이커들이 혀를 내두르든 말든 위스키는 그런 술인 줄로만 알았다. 이런 남성적 시음법과 문화 덕분에 여성들의 위스키 접근성 역시 떨어졌던 게 사실이다. 주량도 약하면서 주당의 이미지를 입은 탓(?)에 술 행사에 왕왕 초대받는 내가 미국 태생의 ‘옥수수 위스키’가 아닌 물 좋은 스코틀랜드에서 숙성된 ‘맥아 위스키’를 본격적으로 접하기 시작한 건 불과 2, 3년 전이다. 인생의 무게와 비례하는 세치 혀의 감각은 더 달콤한 것보단 더 묵직한 걸 원했는데, 와인이나 사케가 식상해질 즈음 더 글렌리벳, 글렌피딕같은 비교적 접근 가능한 싱글몰트 위스키를 만난 거다. 마침 위스키 업계의 마케팅 전략 역시 여성에게 고개를 돌리던 시점이라 싱글몰트 위스키 론칭 행사에서 시음하거나 위스키와 음식 매칭을 경험할 기회가 부쩍 많아졌다. 그 즈음이었다. 싱글몰트 위스키를 잔술로 파는 ‘몰트 바’라는 곳이 귀에 꽂히기 시작한 것이. 


“글렌 뭐였는데….” “한 글자만 더 떠올려 보세요. 글렌으로 시작하는 건 너무 많거든요.” 미리 적어 놓은 술 이름을 찾느라 스마트폰의 메모장을 펼치는 동안 후배는 그야말로 ‘글렌(1800년대 영국 금주령 시절, 조지 스미스가 운영하던 ‘글렌리벳’ 증류소가 처음으로 합법적인 증류면허를 취득하면서 고급 위스키라는 인식이 강해지자 그 이름을 도용하는 증류소가 많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하여 글렌리벳은 ‘더(The)’라는 정관사를 붙여 상표 등록을 했다고)’으로 얼룩진 메뉴판을 덮고는 “뭐 마실까요?”라며 주문의 권한을 웨이터에게 넘겼다. “부드러운 게 좋은데”가 그녀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단서였고, 그가 서비스한 건 글렌모란지 10년 산이었다. 내 튤립 같은 위스키 전용 잔엔 그 사이 이름을 찾아낸 글렌모레이 8년산이 담겨 있었다. 스코틀랜드 위스키의 중심지인 스페이사이드에서도 유서 깊은 도시 엘긴(Elgin)의 ‘글렌 모레이’ 증류소에서 출시된 이 술은 소금을 넣은 것도 아닌데 짭쪼롬한 맛이 났다. 의외의 술 맛도, 포트 스틸처럼 생긴 보틀도 스매력적이었다. 이곳 한남동 싱글몰트 바 ‘스피크이지 몰타르’는 미국 금주령 시대에 몰래 연 술집을 의미하는 ‘스피크이지(Speakeasy)’ 컨셉트를 차용해 작은 창을 통해 문을 두드리는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다음에 문을 열어주는 재미있는 곳이다. 하나 둘 늘어가는 싱글몰트 바에 대한 궁금증을 어디부터 해소할지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들렀다가 분위기가 맘에 들어 다시 찾은 곳이다. 바가 만석이라 테이블에 먼저 앉았더니, 뭔가 허전했다. 우리끼리의 수다도 좋지만 몰트 바를 찾는 즐거움이란 나와 너, 여기에 바텐더와의 교감을 더한 ‘삼자대면의 매력’이 아닐까 싶어 손님이 빠지기 무섭게 자리를 옮겼다. 바텐더와의 대면은 먼저 불필요하게 메뉴판을 뒤적일 일이 없어 좋다. 커버 차지(일종의 입장료이자 봉사료로 최근 많은 몰트 바에서 1인당 5천~1만원 선의 커버차지를 받는다)를 내니까 이 정도 서비스는 받아야 한다는 전제가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며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에 조금씩 빠져드는 재미가 쏠쏠하다. 뒤늦게 다른 후배가 합류해 “얜 중급자예요.” 그랬더니 바텐더는 글렌드로낙 12년 산을 내왔다. “라이트한 과정은 생략하실 것 같아서요”가 그 이유였다. 벤로막 포트 캐스트, 싱글톤 12년산, 글렌모란지 라산타, 그날 마신 술의 리스트는 이 정도다. 계산서를 받아들고서야 이 잔술들의 가격(1만원대부터 3만원대)을 알았는데, 금액으로 치자면 삼삼오오 모여 수입 맥주를 홀짝이는 가격과 별반 차이 나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바텐더가 차갑게 식힌 조니워커 블랙을 내왔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그 잔을 한 모금씩 돌려 마시고 문을 나섰더니 집에 가는 내내 달콤함이 입 안에 감돌았다.


‘남녀 비율이 너무 환상적’이라는 이유로 추천받은 또 다른 싱글몰트 바는 한남동 ‘볼트+82’였다. 층고 높은지하 공간을 로프트 형식으로 재단한 이곳은 위층 테이블에서 내려다보는 부감과 아래층 바 좌석에서 대면하는 평면적인 느낌이 이분법적이다. 오랜 친구 사이인 마서우, 이수영 대표는 “단순한 몰트 바가 아닌 문화를 즐기는 공간이고픈 바람에 예전 무성영화 시절의 영화관 분위기를 재현했고, 소장하고 있는 아티스트 피터 블레이크(Peter Blake)의 아트 작품도 내걸었다”고 한다. 스토리텔링이 깃들면 그에 걸맞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마련인지 유럽 살롱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이곳에서 몸에 꼭 맞는 수트를 입고 시가를 태우며 위스키를 음미하는 취향 있는 남자들을 여럿 목격했다. 이런 입소문 때문인지 동석하기로 한 후배 역시 드레스업하고 나타났다. 바에 앉은 우리에게 마서우 대표는 다섯 가지 술을 선보였는데 캐스크별, 그러니까 어떤 오크통에서 숙성됐는지와 싱글몰트 위스키 이외의 주종을 비교할 수 있는 리스트였다. 그중 ‘브룩라디 퍼스트 그로우스 퀴베 F’는 아메리칸 버번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원액을 보르도의 특급 와인인 샤토 라플뢰르 포메롤을 담았던 화이트 와인 오크통에 추가 숙성시켜 1만2000병만 한정 생산된 귀한 제품이었다. 버번의 마일드함과 와인의 달콤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첫 잔을 마실 땐 마냥 행복했다. 그리고 아일레이 몰트 위스키 라프로익 10년 산을 마시면서 ‘쨍그랑!’ 그 이미지는 산산조각 났다. 간단하게 ‘병원 맛’으로 표현할 수 있는 라프로익의 스모키한 맛과 향은 우리가 마시기엔 하드코어한 위스키였다. 브루클린 라거를 주문한 건 입 안을 깔끔하게 만들어줄 응급처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와 만났다. “싱글몰트는 더 이상 스코틀랜드에서만 만드는 술이 아니에요. ‘야마자키’는 정형화된 구조나 진득한 면에선 유럽 술보다 좋아요.” 일본산 위스키라, 가만 생각하니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주인공 밥이 일본에 들른 건 위스키 광고 촬영 때문이었는데 그때 그 브랜드는 산토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감정을 넣어서 천천히 카메라를 보세요. 그리고 말해주세요. 당신의 사람을 위해, 산토리 타임!” 대략 이런 대사가 있었지 아마. 일본에서도 위스키가 생산되고 있었고 그중 일본 최초의 싱글몰트 증류소 야마자키에서 내놓은 18년 산은 셰리 오크통에서 18년간 기거하며 깊고 달콤한 애티튜드, 젠틀한 면모를 갖춘 터라 이따금씩 떠올리게 되는 남자 같았다. 많은 싱글몰트 위스키가 가진 특유의 남성성은 덕분에 여성들이 관심 갖기에 충분한 특징이라는 걸, 이날 비로소 눈치챘다. 

“위스키는 이모셔널한 술이에요. 맛을 예측하고 만드는 술이라기보단 물리적인 시간이 숙성시키는 맛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술이 간직한 시간을 마실 수 있어요.” 위스키의 매력은 마서우 대표가 말한 '술의 시간'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는 최고의 럭셔리를 ‘시간’으로 꼽기도 했는데, 시간을 간직한 술을 시간을 들여 마시는 나의 시간에 제값을 치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빨리 마시기 위해 콜라따윈 섞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시간으로 빚은 술이 위스키뿐은 아니어서 몰트 바에는 다양한 주종을 선보인다. 기가 막힌 칵테일 메뉴도 여럿 있다. 그러니 싱글몰트 위스키와 몰트 바에 대한 궁금증이 인다면 맘에 드는 바에서 일단 말문을 트면 된다. 몰트 위스키가 뭔지, 싱글몰트 위스키는 무얼 말하는 건지, 생산지의 지역적 특성 등은 일단 시간을 들여 한 잔 마신 후에 알아도 늦될 게 없다. 우리가 와인에 쉬이 지친 건 넘치는 정보로, 다소 가식적으로 술을 배운 탓도 없지 않는가. 다만 이왕 갈 거라면 제대로 된 바텐더가 상주하고 싱글몰트 위스키의 주종이 다양하게 겸비된 전문 몰트 바를 찾는 게 좋겠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곁들이다 보면 입맛이 취향으로 변하는 날이 올 거고, 한 병쯤 구입해 에어링을 즐기는 날도 오게 되지 않을까 싶다. 면세점에 들를 때면 어김없이 싱글몰트 위스키 한 병씩 업어오는 이 호기심 많은 주당처럼. ▒






*<ELLE Korea> 201310에 게재된 컬럼의 재편집본입니다.   



초보에게 추천 싱글몰트 위스키!

glen moray 8 years old 부드러운 짠맛이라 강한 알코올과 피트향에 거부감 돋기 쉬운 초보자들이 무난하게 마시기에 좋지만 굳이 초보 단계부터 시작하기 싫은 이들은 10년산 샤도네이 캐스크부터 먼저 시도해도 무방하다.

glenmorangie 10 years the original 프루티한 향이 감미롭고 목넘김이 마일드한 여성스런 위스키라 초보자가 편안하게 마실 수 있다. 좀 더 진하고 풍부한 버전을 원한다면 글렌모렌지 라산타에서 시작하는 것도 괜찮다.

glendronach 12 years old 셰리 마스터라고 불리는 글렌드로낙은 코리아 에이션이 출시될 정도로 한국에서 인기가 많다. 12년산은 달콤함이 베이스된 술로 처음이라고 무조건 라이트한 건 싫다면 시도해 볼 만하다.

the glenlivet 12 years old 개인적으로 처음 시도한 싱글몰트 위스키라 애착이 간다. 꽃 향기, 열대 과일 맛으로 표현되는 풍부한 향과 맛이 좋은데, 너무 멀멀하지도 아주 강렬하지도 않고 오히려 적당한 풍미가 있다.

the yamazaki 18 years old 한 잔을 마셔도 깊고 진한 향과 맛을 원한다면 더 야마자키 18년 산이 답인 듯하다. 모든 술이 그렇지만 12년 산과 18년 산은 캐릭터 자체가 다르다. 더 천천히 즐길 거라면 18년 쪽이 좋을 듯.


 COURTESY OF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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