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사서함, 7

유치원생의 생존비법

by 빵도자기 장인

2024.10.15.화.


내가 가장 바라는 모습으로 내가 아는 것들을 그렸다.

내가 아는 것들은 몇 개 없었지만 그림을 그린다는 건 자신이 원하는 바가 현실과 다를 때, 본능적으로 그 괴리감을 채우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 커, 그것을 가시화하는 행동으로 표출되는 게 아닐까?


아빠가 보고 싶다면 아빠를 그리고, 따듯하고 싶다면 따듯한 색을 채우고, 반짝이고 싶다면 반짝이를 채우고, 목이 마르면 코코아를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이 그리우면 가족들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예쁜 색을 보고 싶으면 꽃과 나비를 대량 생산해낸다.


그리고 그건 물리적으로 실재하지 않지만 마치 만질 수 있는 것처럼, 그 속에 내가 있는 것처럼, 내 주위를 아름다운 것으로 채울 수 있고 그 충만함 속에서 풍요롭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여전히 5살, 6살의 체리와 양배추를 가지고 있는 모든 크레용과 싸인펜을 동원해 꼼꼼히 묘사했던 못생겼지만 애교 많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이 최고의 희열이고 행복이었던 호기심 많은 18kg 정도 되는, 앞니도 없이 웃고 다니는 무해한 어린애가 어딘가 있는 것 같다. 20대 대학시절을 거쳐 선생님이 되어서도 작가가 되어서도 그 시선을 갖고 살아간다.


아직도 양배추랑 체리를 더 그리고 싶고 더 배우고 혼도 조금 나야 할 것 같은데 눈 앞에 있는 사물들이 예전보다 참 작아져있다. 색깔도 미세하게 옅어지고 밋밋해진 것 같다. 그림 속에서 벗어나니 코코아도 가족도 반짝이도 나비도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다시 그림 속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림을 그만 그릴 수 있는 날이 올까. 언젠가 그림과 내가 닮아있기를 소망하며 한 번 더 다시 그림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기어코 따듯한 색을 만들어 여기저기 채워야지~

양배추와 체리를 크게 그리고 웃는 얼굴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사랑받을 수 있다.


-풍요로운 유치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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