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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일 Nov 20. 2020

립밤이 쏘아올린 평화

fiction 과제-2

 

 키스가 좋으면 다 좋다. 입술의 감촉과 입 냄새가 거슬리지 않는다면 살의 그것도 마찬가지일 확률이 높고, 피부의 느낌과 체취가 좋다면 섹스 역시 좋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좋은 섹스는 상쾌한 기분을 주고, 상쾌한 기분의 사람은 좀 더 열심히 일을 하거나, 자비심이 발동해 구호단체에 후원을 하거나, 분리수거에 꼼꼼해지거나, 고급 옷을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할지도 모른다. 결국 좋은 키스는 세계의 발전과 평화에 미묘하게 이바지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키스의 가능성 직전에 놓인 립밤을 중요하게 여긴다. 내가 몇 년째 쓰고 있는 립밤은 카멕스 체리 튜브형이다. 카멕스 립밤은 부드러운 발림성과 남다른 흡수력을 자랑한다. 매일 껍질을 무한 생성 해내는 입술의 방어적인 태도에도 기죽지 않는다. 어느새 사무실에 침투해 요구르트 샘플을 손에 쥐어주시는 요구르트 아주머니처럼... 상당히 노련하게 수분을 채워준다. 게다가 체리 향 역시 단조롭지 않고 풍부하다. 키스할까 말까, 아니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평화의 손을 들지 않고선 못 배길 달콤함이다. 실제로 내게 그랬던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립밤 향에 홀려 실수로 세계 평화에 일조한 적이 있었다.

 윤의 집에 놀러 갔던 날이었다. 그날 윤과 나는 둘 다 재택근무 중이었기에 나란히 식탁에 앉아 각자의 일을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우리는 이상하게 한가했고, 이상하게 웃음이 잦았고, 이상하게 졸렸다. 결국 늦은 오후에 함께 낮잠을 잤다. 먼저 일어난 나는 모로 누워 윤의 귀를 구경하다 배가 고파졌다. 윤의 얼굴에서는 아주 맛있는 코코넛 냄새가 났다. 간지러운 갈증이 일었고 충동적으로 입에 입을 갖다 댔다. 고소한 정적. 황당함을 뒤집어쓸 준비를 하고 윤을 쳐다봤다. 게슴츠레 눈을 뜬 윤이 배가 고프냐 물었다. 윤과 커피를 배달시켜 먹으면서 립밤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서로 알아봤다. 체리와 코코넛. 나는 친구가 많이 없고 친구 사귀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윤이 더 이상 나와 친구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윤은 생각보다 쿨한 아이였다. “너는 맨날 맛있는 것만 먹더라.” 윤의 말이 저의 립밤 이야기일지, 나의 립밤 이야기일지 음흉히 가늠하던 찰나 윤은 내 커피를 빼앗아 한 모금 쭉 빨아당겼다. 역시 맛있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가끔씩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이인조가 되었다.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윤을 안고 싶어지면 전통적인 이인조 로켓단의 대사를 종종 인용했다. 그럴 때마다 윤은 ‘로켓단은 로사, 로이, 냐옹이(혹은 마자용)까지 삼인조’라고 늘 정정했다. 윤이 쓰는 립밤은 록시땅 시어버터 스틱형이다. 코코넛과 바닐라가 부드럽게 섞인 향이 나는. 윤이 그 제품을 쓰는 이유는 딱히 없다고 했지만 내가 코코넛 향에 열광하는 바람에 앞으로는 쭉 그 립밤만 쓰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이후 나는 내가 아는 모든 남자 애들에게 록시땅 시어버터 립밤을 사라고 떠들고 다녔다. “내가 아는 애가 쓰는 건데...”라는 말을 꼭 덧붙이면서. 사실 그들에게 나는 그냥 윤의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립밤을 빌려 윤에 대해 쓰고 있는 것처럼. 윤과 놀고 집에 온 어느 날엔 후리스 주머니에서 윤의 립밤이 발견됐다. 그걸 종일 만지작대면서 함부로 바르지도 못했다. 진짜 그게 윤의 일부라도 되는듯이. 그제서야 겨우 내가 걔를 짝사랑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립밤이 쏘아올린 평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 잘 알다시피, 로켓단은 원래 맨날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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