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지나, 여전히 살아가는 마음들에게
재원은 담배를 물었다. 그의 앳된 손가락 사이에서 덜 익은 담배가 어색하게 까닥거렸다. 마치 그를 물어 삼킬 것 같은 담배연기, 어른흉내를 내는 아이의 허세를 가려주기엔 언제나 그렇듯 턱없이 부족했다. 아파트 불빛이 층마다 촘촘히 켜졌지만 그 속에서 그는 더 깊은 적막을 느꼈다.
한쪽 손으로 휴대폰 메신저의 친구목록을 무심하게 넘겨보던 중, 학급 단체 대화방에 호정이 올린 알림이 떴다. 재원은 대충 공지를 읽고 메신저를 닫으려 했지만 불현듯 그의 눈에 호정의 프로필 사진이 들어왔다. 호정은 학교체육복 바지를 추켜올려 입고서 고무장갑을 낀 양팔을 들어 춤을 추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볼에 억지로 그린 주근깨와 눈을 더 감춰버린 익살스러운 표정까지, 호정은 한없이 유쾌해 보였다. 아마도 이번 연도 전교부회장이 된 호정이 간부수련회에 가서 찍은 사진인 모양이었다. 재원의 머릿속에 수학시간엔 배가 툭 튀어나온 선생님의 개그에 장단을 맞추고 체육시간엔 배드민턴을 후려치며 깔깔대던 호정의 모습이 단편적으로 떠올랐다.그녀를 볼 때마다 재원의 속은 낯선 비늘에 찔린 듯 쓰라렸다. 호정은 그의 안쪽 무언가를 뒤틀리게 만드는 다른 세계의 사람인 것 같았다. 더구나 그녀는 지난 기말고사 때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재원은 담배를 모래 위에 떨어뜨리고는 발로 거칠게 짓눌렀다. 마음속 불씨까지 같이 눌러버리려는 듯이.
아파트 단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림자 속에 서 있으니, 몸이 그보다 더 얇아지는 듯했다.
자전거를 이끌고 아파트 동으로 들어서자 ‘자전거는 자전거 보관소에 두세요.’라는 공지가 게시판에 여전히 붙어있었다. 재원은 그 공지를 볼 때마다 자신을 저격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이면서도 매번 고집스럽게 자전거를 12층인 집문 앞에 걸어두곤 했다 학교 든 버스든 아파트든, 어딜 가든 요즘엔 ’해야만 한다.‘라는 규칙들뿐이었다. 그까짓,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집에 들어오자 엄마가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그 표정은 ‘괜찮아’라는 걸 티 내는 방식이었다. 그 표정은 재원에게 미안함과 짜증을 동시에 일으켰다. 엄마는 재원에게 왜 이렇게 늦었냐며, 말을 건넸지만 재원은 딱히 이렇다 할 대꾸 없이 그의 방 안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문을 닫자마자, 재원은 그대로 침대 위에 무너져 내렸다. 삼킨 말들이 목에 걸려 답답했다. 두 주먹은 저도 모르게 이불을 구겨 쥐고 있었다. 휴대폰을 보니 이미 시간은 10시가 넘어있었다.
‘아, 또 시작이네.’
이때 오늘도 어김없이 재원의 귀를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주일 전부터, 밤만 되면 위층에서 어린아이의 노랫소리가 흘러내렸다. 가사도 듬성듬성 빠뜨리면서 제멋대로 불러대는 소리를 들으며 재원은 신경질적으로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재원은 미간에 잔뜩 주름을 찌푸리고는 휴대폰 녹음 어플을 켰다. 녹음이 되고 있는지를 확인한 후 손을 천장과 창가 쪽으로 번갈아 뻗어가며 이 한밤중의 노성을 녹음했다. 재원은 친구 동인에게 녹음파일과 함께 짜증 섞인 메시지를 보냈고 곧이어 동인의 ‘층간소음으로 신고해’라는 비아냥이 돌아왔다. 문득, 재원은 아파트 게시판의 그 빈구석이 떠올라 A4용지와 컴퓨터용 사인펜을 꺼내 들었다.
매일같이 신경을 긁어대는 소리에 대해 뭐라고 적을까, 고민하던 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엄마가 살짝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는 이 소음에는 별 대수롭지 않은 듯, 조용히 다가와 물 컵을 내밀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이사인 거 알지?”
엄마의 말에 재원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집 아줌마가 너 자전거 그냥 편하게 두라고 하시더라.”
재원은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는 재원의 반응에 조금 더 용기를 얻었는지 이 집에 온 지도 7년이 넘었다는 둥, 처음엔 새집 같았는데 지금 들어오는 사람은 싹 고치고 들어와야 한다는 둥의 이야기를 도란거렸다. 재원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이사가 며칠 남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했다. 드디어 다음 주부터는 떨어져 살고 있던 아빠와 함께 살게 되는 것이다. 이사 온 지 3년 만에 아빠는 발령으로 다른 지역에 가게 되었다. 그 뒤 4년 동안, 한 달에 두어 번 얼굴을 보는 게 전부였다. 처음엔 아빠의 빈자리가 집안 전체를 감싸는 것 마냥 크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크기가 작아졌다. 어느 순간, 엄마와 단 둘이 지내는 게 더 익숙하고 편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빈자리는 여전히 재원의 마음속에 아파트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엄마가 방에서 나간 후, 재원은 약 두 알을 털어 넣고 엄마가 도란거렸던 이야기들을 생각했다. 재원이 문 앞에 자전거를 놓는 바람에 옆집 아이들이 지나다니기 힘들다며 여러 차례 이야기해 왔었다. 하지만 이사 갈 무렵이 되니 옆집 아주머니가 한발 양보해 준 모양이었다. 아파트 게시판에 눈에 거슬렸던 공고문이 사라진 건, 떠나는 이웃에 대한 선심일지도 몰랐다.
재원은 펼쳐놓은 A4용지를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컴퓨터를 켰다. ‘지난 7년 동안 좋은 추억이 많았습니다.’라는 상투적인 문장부터 적기 시작했다. ‘밤마다 들리는 위층의 노랫소리가 듣기 좋았습니다.’ 뒤이어 ‘자전거를 매번 자기고 올라와서 죄송했습니다.’ 등의 말들을 입력했다. 따로 몇 호인 지는 적지 않았다. 재원은 방을 찬찬히 한번 둘러보고는 마지막으로 ‘모두들, 안녕하시길.’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말과 함께 출력한 자신만의 아파트공지를 비어있던 게시판 한쪽에 붙였다. 막상 방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니, 내일 아침에 떼면 그만이었다. 게임을 재촉하는 동인의 메시지 진동이 울려대자 재원은 침대에 몸은 던지고 휴대폰게임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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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괜한 짓거리를 했네, 허둥지둥 등교준비를 하자마자 재원은 어젯밤 붙여놓은 종이쪼가리를 떼어버릴 참으로 서둘러 아파트 게시판 앞에 섰다. 하지만 재원의 손은 쉽사리 게시판의 그것을 떼려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재원은 자신이 붙여놓은 종이의 아래쪽에 먹힌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각지고 큼지막한, 그 반듯한 그 필체는 ’ 이사 가서도 즐겁게 지내길 바라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글자를 보는 순간, 재원의 가슴도 같이 흔들렸다. 작은 종잇조각 하나가 자신을 붙잡아주는 듯했다. 재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자전거로 몸을 돌려 학교로 향했다.
영어수업이 끝날 무렵 선생님은 이제 곧 치르게 될 중간고사 범위에 관해 얘기했고 이에 학생들의 갖가지 탄식소리가 교실을 채웠다.
”범위가 너무 많지 않냐? “
“이번엔 난이도가 좀 올라갈 수도 있어.”
호정이 주변의 친구들과 함께 이번 영어시험에 대해 토론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젠 다 자질구레한 이야기일 뿐이지, 재원은 주변의 이야기들을 의식적으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재원은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불안감으로 오른손이 미세하게 덜덜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재빨리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 고개를 바짝 숙였지만 이내 선생님과 친구들의 모든 말들이 재원의 귀에는 왱왱거리는 소리로 들려왔다. 숨이 조여 오는 찰나, 다행히 수업이 끝남을 알리는 벨소리와 함께 재원은 그 자리에 가만히 엎드렸고 그의 곤두박질 칠 것만 같았던 순간은 서서히 고요하게 돌아왔다.
재원이 이런 불안감에 가끔씩 몸서리치게 된 것은 지난 학기 기말고사 무렵부터였다. 중학교시절 꽤나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던 재원은 특목고에 진학하려 했지만, 그의 기대감은 실패에 부딪혀 실망감으로 돌아왔다. 이후 애써 잘된 거라고 위로하며 고만고만한 일반고에서도 성적만 잘 받으면 된다는 엄마의 말에 재원은 집 근처의 가까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그 고만고만한 학교의 첫 시험에서 재원이 받은 등수는 중학교 때와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었다. 재원이 첫 성적표를 받았던 날, 엄마의 실망하는 표정과 온화한 말투 속 비난은 마치 심 없는 샤프로 책상에 글씨를 새기듯 재원의 가슴에 날카롭고 아프게 긁혔다. 이후 재원은 다니던 학원을 그만두고 과외 선생님을 받아 공부했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해 이따금씩 눈 밑이 파르르 떨려오기도 했다. 그 어느 때부터 재원의 세상은 점점 그 다채로운 색감을 잃고 회색빛으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 1학기 기말고사의 첫날, 시험지를 펼치자 숫자들이 눈앞에서 모양을 잃었다. 칸은 텅 비었고 숨은 목을 틀어쥐듯 조여왔다. 날카로운 공포감과 함께 숨이 턱 막히며 샤프를 쥔 오른손이 덜덜 떨려와 재원은 그 손을 움켜쥔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시커먼 암흑 속에서도 달려오는 뒤엉킨 숫자들이 눈알을 찌르는 것 같았고 심장은 요동쳤다. 재원은 샤프를 들고 문제지를 노려봤다. 하지만 샤프는 그대로 종이 위에 멈춰있었다. 눈앞 글자가 뿔뿔이 흩어지는 동안, 답안 칸은 여전히 빈칸이었다. 재원은 억지로 컴퓨터용 사인펜을 눌러 OMR카드에 점을 찍었다. 한 줄을 채웠을 무렵, 펜 끝이 허공에 멈췄다. 재원은 양 겨드랑이에 손을 꽉 넣고 몸을 웅크렸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내 답안을 쓰는 대신 지우개만 잘게 부수고, 그 가루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흩뜨렸다. 포기는 언제나 그렇듯 막연했다. 슬픔도 걱정도 구체적이지 않았다. 다만, 지우개 가루처럼 손끝에 달라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남은 건 풀리지 않은 문제들과 쉽게 지워지지 않는 마음뿐이었다.
“답을 채우지 못했어. 엄마.”
그날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는 재원에게 우울증으로 인한 공황이라는 것을 설명했다. ‘고등학생이 된 지 고작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도대체 내가 뭘 얼마나 했다고, 나처럼 약해빠진 애가 또 있을까.‘
의사의 말을 듣는 내내 재원의 가슴은 경련처럼 뒤틀렸다. 재원은 옆에 있던 엄마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곁의 공기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잠깐 스친 엄마의 손등에는 도드라진 핏줄이 파랗게 부풀어있었다. 그 손이 든 물컵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 재원은 고개를 숙인 채 더 이상 눈을 들지 못했다. 아빠의 빈자리가 커져가면서 엄마와 재원은 하루하루를 서로에게 의지하며 지내왔다. 퇴근하자마자 재원의 옆에 앉아 매일같이 숙제를 확인하고 학교에서든 학원에서든 시험이 있다고 하면 미리 모의시험지까지 만들어 준비시켰던 엄마였다. 한때는 그것이 진저리 나게 싫었지만 지금은 그렇게라도 함께 했던 시간이 그립게 떠오를 때도 있었다. 새벽까지 공부를 봐준다며 자신의 잠까지 모두 제쳐놓고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연신 말해오던 엄마는, 그날 유독 말이 없었다. 그 이후 여름방학 동안 재원은 주로 피시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매일 두 알씩 처방받은 약을 먹으며 이주일에 한 번씩 병원으로 상담이라는 것을 다녔다. 기분이 잠시마나 좋아질까 싶어 담배도 피우기 시작했다.
의사가 말한 우울은 무작정 슬프기보다는 어떤 것도 기쁘지 않다는 것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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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시방 ㄱㄱ?‘ 하교를 알리는 담임선생님의 종례를 듣던 중 동욱에게 메시지가 왔다. 재원은 여느 때라면 여지없이 그곳으로 향했겠지만 오늘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왠지 아파트 게시판에 붙여놨던 자신의 그 종이 메시지를 다시 보고 싶었다. 혹시 그 반듯한 필체 밑에 또 다른 메시지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누군가가 이미 그것을 사소한 장난이려니 하며 떼어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아파트로 돌아가보니 아직 자신의 종이가 단단하게 눈에 띄었다. 가까이에 다가가 두 개의 메시지가 더 남겨져있는 것을 보자 재원은 기대했던 뭔가를 제때 마주한 것 마냥 들뜬 기분이 들었다. 한 개는 어린아이의 것처럼 보이는 그저 웃는 얼굴을 동그랗게 그려 넣은 것이었고 나머지 한 개는 길고 둥근 필체로 ’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짤막하게 적힌 것이었다. 재원은 그 메모들 위에 적은 자신의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에 재원은 얼굴이 화끈거리며 마음이 울렁였다.
”어머, 아들 오늘은 웬일로 일찍 왔어? “
재원이 집에 들어서자 엄마가 동그래진 눈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일찍 끝났어. “
엄마는 재원이 방에 들어가는 걸음을 총총 따라가며 재원의 다른 말을 기대하는 눈치를 보였다가 이내 다시 말을 건넸다.
”근데 밑에 뭐 붙여놓은 거 있던데, 네가 한 거야? “
재원이 무심한 척 고개를 끄덕이자 엄마는 한껏 웃으며 고조된 말투로 옆집아줌마와 나눈 대화와 게시판을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재원은 멋쩍은 표정을 내보이면서도 엄마의 화사해진 얼굴이 반갑게 느껴졌다.
8시, 위층에서 또다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어제보다는 이른 시간부터 노래를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재원은 주섬주섬 이어폰을 꺼내 꽂고는 그저 손가락에 잡히는 노래의 재생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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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같은 로고가 찍힌 조끼를 입은 아저씨들이 분주하게 집을 드나들었다. 거실에 정리해 놓았던 박스들은 거의 사라져 있었고 굵직한 가구와 가전제품들은 이제 몇 개 내려가 있는 상태였다. 재원은 엄마가 아저씨들을 따라다니며 요리조리 간섭하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작게 가로저으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집을 한번 쓱 둘러보았다. 엄마와 나, 둘이 채웠던 공간이 비워져 가는 사뭇 어색한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고 밑으로 내려왔다. 게시판에 붙인 자신의 편지를 보니 이젠 제법 여러 메모들이 남겨져있었다. 장난스러운 낙서부터 친절한 말들, 심지어 경비원 아저씨의 인사까지. 눈에 거슬리기만 했던 아파트 게시판은 이젠 재원에게 사뭇 달라진 의미로 다가왔다. 남겨져있는 메모들을 꼼꼼히 읽어본 후 재원은 게시판에 손을 뻗었다가 이내 휴대폰을 꺼내 편지의 사진을 두어 장 찍고 그대로 남겨두었다.
재원은 가을로 접어드는 것을 알리듯 시원해진 아침공기를 느끼며 익숙한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아슴푸레 빛나는 아침에 건물을 보니 아파트 색감이 무릇 달라져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분명 처음 이사 왔을 때 새하얀 색을 띠고 있었던 단지들은 이젠 온화한 베이지색으로 바래있었다. 적갈색 벤치의 선명하고 매끄럽던 결도 어느덧 까슬해졌음이 손으로 느껴졌다. 발 밑에 반짝이는 모래로 시야를 옮기자 버려진 꽁초가 보여 재원은 꽁초를 감추고는 발로 꾹 눌러 덮었다. 이후 그 모래 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원은 그의 오른손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야, 김재원! “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옆 건물로 이어지는 길목에 호정이 히죽거리며 서있었다. 검은색 후드 집업,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입은 학교 체육복바지, 다리를 지그재그로 쿵쿵거리는 모습이 참 호정다웠다. 토요일 이른 시간부터 책가방을 메고 있는 걸 보아하니 역시나 학원에 가는 길인 듯했다. 재원은 잠시 주춤하다가 이내 한쪽 손을 번쩍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호정에게 인사했다. 호정은 씩 한번 웃고 손을 크게 흔들며 이내 다시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재원의 어깨가 내려앉고 숨은 부드럽게 흘렀다. 혼자가 아니라는 게 이렇게 쉽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재원이 호정을 향해 품었던 모호한 분개심은 없으리만큼 누그러지고 마음 한쪽이 환히 비어지는 듯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아직 덜 마른 호정의 짧은 머리가 호정에게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원은 주머니에서 휴대폰과 이어폰을 꺼내 들었다. 이어폰을 꽂고 재생목록을 쓰윽 보다가 이내 녹음파일로 손가락을 옮겼다. 피식하고 재원의 입매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재원은 고개를 들어 햇빛을 마주하며 하늘을 바라봤다.
꼬마아이의 노랫소리가 하늘을 채웠다. 재원은 고개를 들어, 그 소리에 맞춰 조금 더 깊게 숨을 쉬었다.
여전히 힘겨운 날들이 있다면,
기억해 줬으면 한다.
너는 그 자체로 충분히 소중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잘 살아내고 있다는 걸.
오늘의 너와 내일의 너,
그 모든 모습이 다 안녕이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