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작되기 전에 갔던 곳이... 코타키나발루였지? 그게 벌써 재작년이네. 원래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동남아 갈 생각을 못했는데 표를 미리 끊어놓은 탓에 일사천리로 진행됐지. 역시, 계획을 세우려면 저지르고 봐야 돼. 안 그러면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게 된다니깐.
그때, 얼떨결에 끊은 표 덕분에 도착한 코타키나발루는 엄청 예뻤다? 사람들이 노을, 노을 하길래 어느 정도는 기대를 했지. 근데 너무 기대하려고 하지는 않았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하기 쉽잖아. 근데 와... 5시부터 기다려서 본 노을은 정말 상상 이상인 거야. 말 그대로 내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하늘이라 상상조차 어려웠던 거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노을은 주황색 하늘? 정도잖아. 근데 내가 본 노을은 한 가지 색이 아니었어. 푸른 하늘에서부터 점차 파스텔톤 주황빛이 물들기 시작하면서 하늘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노랑, 주황으로 가득 차. 그리고 어두워지는 게 아니라, 해가 점점 저 바다 끝으로 지면서 보라색 물감을 풀어내. 하늘에서 그런 색이 보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 그 사이사이로 핀 구름들은 또 얼마나 그림 같던지.
그 시끄럽던 해변도 노을이 뜨면 신기하게 잠시 동안 고요해진다? 그 사이로 파도 소리는 은은하게 퍼지고. 아주 적당히 따뜻한 온도, 파도소리와 보라빛 하늘, 솜사탕 같은 구름, 그리고 사람들의 실루엣... 나는 눈만 감으면 아직도 그때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어. 보통, 코타키나발루 여행을 4박, 5박 했으면 많이 했다고 하거든? 왜냐하면 노을 외에 볼 게 많이 없고 스노클링이 맞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거든.
근데 나는 12박을 있었어. 매일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노을은 몇 번을 봐도 지겹지 않더라고. 커피를 마시면서, 맥주를 마시면서, 밥을 먹으면서, 간식을 먹으면서 보는 노을은 매일 달랐고 심지어 노을이 뜨지 않는 흐린 날씨에도 그거 나름대로 좋더라. 그냥 첫날 노을에 콩깍지가 씐 거지.
항상 정신적으로 지칠 때쯤, 여행을 떠났던 것 같아. 라오스, 베트남, 말레이시아... 돌아보니 쉬러 떠난 여행은 전부 동남아였네. 동남아 특유의 여유로움이 좋았나 봐.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면 결국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나였고, 그런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곳은 동남아였어. 여유로운 쉼을 줄 뿐만 아니라 내 평범한 삶에 보라빛 노을같이 영감을 불어넣는 곳 말이야.
참, 이야기가 너무 밖으로 샜구나. 결론은, 다음 여행지도 동남아라는 거야. 나한테 여행은 동남아, 동남아는 여행, 인 거지. 성인이 되어 친구와 첫 배낭여행을 떠난 곳이 라오스 비엔티엔-방비엥-루앙프라방이었고, 두 번째 여행이 베트남 호찌민-무이네-달랏-나짱이었고, 첫 가족 배낭여행도 베트남 다낭이었고... 다른 나라, 여행지도 그만의 매력이 있겠지만 글쎄, 아직 나한테는 온전한 쉼을 줄 수 있는 나라들이 동남아에 있는 건 부정할 수가 없네.
코로나가 끝나면 이번엔 아예 한 달 살기, 이렇게 여행을 떠나보려고. 시간의 제약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예정에 없던 마음에 드는 곳, 좋은 사람들을 만난다면 더 오래 머무는 거야. 지역 토박이에게 찐 로컬 맛집을 추천받고 새로 온 여행자에게 또 그 집을 추천해주고. 어떤 날은 숙소에서 좀 떨어진 곳까지 투어를 가고, 어떤 날은 숙소 앞 카페에서 진하게 글 한 번 쓰고. 아, 유튜브도 찍어봐야겠다. 아이 참, 나 너무 유명해지는 거 아냐? 유튜브로 세계여행할 수 있으면 좋겠다... 구독, 좋아요, 눌러줄 거지?
그래서, 자! 그때를 생각하며 지금부터 내가 준비할 건 우선, 건강한 몸만들기! 지금 상태면 2주 정도 지나면 앓아 누을 듯싶다. 열심히 운동해서 체력을 키우고, 또 시원시원하게 수영도 하고! 그다음에는 영어 공부도 해야지. 현지인이랑, 혹은 여행객이랑 프리 토킹 하려면 공부해야지. 어차피 영어 공부는 해야 하니깐... 스피킹 위주로 한 번 해봐야겠다.
그리고, 여행의 묘미가 예측 불가능, 불확실성 아니겠어? 한 번의 여행으로 내 인생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런 예측 불가능한 상황들 속에서 나만의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것 같아. 우리 일상에서는 나만의 선택이 아닌, 타인의 조언, 관심, 약간의 강요들 속에서 왜곡된 선택을 내리기 쉬운데 여행지에서는 정말 나만의 선택을 내리게 되잖아. 여기서 묵어야 할까, 이 쪽 길로 가야 할까... 등의 사소한 선택부터 말이야. 오로지 나만의 선택이라 불안하기도 하지. 근데 그런 크고 작은 선택들이 모여서 엄청난 감동을 만들어 내는 거 알아? 여행 가면 고생했던 것들이 다 내 선택으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즐거움으로 남는 거 아닐까? 인생도 똑같은 것 같아. 항상 좋은 일이 생기는 건 아냐. 그치만 그 선택이 내가 내린 선택이냐, 아니냐에 따라 어떻게 기억되는지가 달라지지.
여행을 떠나기도 전인데 묘~한 기대감을 품으면서 일상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드네. 벌써부터 그 효과가 나오는 것 같아! 그때를 기대하면서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