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른 빈터에서 이불을 덮습니다. 조만간 찰 것 같긴 하지만.
※사실 이 글은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지극히 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독후감입니다.
습관적으로 불평불만을 뱉어내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과 가끔씩 "그럼 하고 싶은 게 뭐냐"라는 주제로 대화를 하곤 하는데, 나는 항상 '글쓰기'라고 대답을 해왔던 것 같다. 맞춤법도 잘 틀리는 마당에 무슨 글이냐 싶겠지만, 꽤 오랜 시간 수줍은 작가 지망생의 태도로 살아왔다. 그런데 왜 쓰고 싶은지, 어떤 걸 쓰고 싶은지 물어보는 후속 질문은 없었다. 왜 쓰고 싶은지를 충분히 맵게 설명하지 못했다.
"바람의 맛을 표현해 보고 싶습니다."
또 사춘기 직장인이 하루키 컨셉 잡고 앉았네라고 한마디 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것이 사춘기라면 또 받아들여야 한다는 마음으로 온전히 이불 킥을 준비해 보련다.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느낀 바람의 맛
대학 시절 우연한 기회에 영화 현장에서 막내로 일을 한 적이 있다. 현장에서 주로 간식 테이블을 세팅하고 짐을 옮기는 허드렛일을 했는데, 고참 스태프들 옆에서 대기하면서 바로 심부름을 해 드려야 했기 때문에, 항상 고참들의 동태를 살피며 '존재는 알리되, 보이지 않게' 생활해야 했다. 지방 촬영이 대부분인 현장이었기 때문에 숙소 생활까지 생각하면 고참들과 대부분의 하루를 붙어서 함께 지내야 했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내다가 진급 비슷한 것을 해서 서울로 필름(!)을 배달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현장에서 찍은 필름을 받아 서울에 있는 현상소까지 배달을 하는 꽤 중요한 역할이었다. 배달 사고가 나면 하루치의 촬영분을 날리는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수면 시간이 보장되는 자리였다.
남들이 모두 현장에 나가 일을 하고 있을 때 필름을 기다리며 모텔방에 있는 시간이 좀 어색해서 밖으로 나와 담배 한 까치를 꼬나물었을 때, 한 줄기 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바람이 어떤 맛인지 느껴졌다. 계절 특유의 냄새랄까? 생활감이 느껴지는 할머니 집 냄새랄까? 그동안 맛보았던 공간의 냄새와는 약간 다른 그 맛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알량하지 않은 일정과 마음의 여유를 가져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많은 스태프들이 고생하며 만든 그 영화는 결국 잘 되지 않았다. (다들 잘 지내시죠?) 나 또한 생계를 위해 (다행히!) 취직을 했고 시간이 많이 흘러 어떻게 이 자리에 앉게 되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직장생활을 하는 내내 의도적으로 그 바람의 맛을 느껴보기 위해서 계속 노력해왔다는 것이다. 어렵게 시간을 내어 같은 장소에 가본 적도 있지만, 그 순간 그 맛은 어디서도 다시 느낄 수 없었다.
이제는 이 바람의 맛을 표현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희미해졌지만, 잠깐의 찰나에 느꼈던 바람이 나를 계속해서 어디론가 끌고 왔다고 생각한다. 영화인 지망생, 몇 년간의 해외 살이, 그리고 두 아이의 아빠까지 십수 년간 아이덴티티를 바꾸며 달려오는 내내, 몇 번의 계절을 겪으며 이 바람의 맛을 글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내가 재능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에게 허락된 알량한 며칠간의 휴가와 어디론가 떠나도 사무실에 두고 온 마음 때문에 시작을 못했다고 핑계를 댄지도 시간이 꽤 흘렀는데, 얼마 전 큰 마음을 먹고 육아 휴직을 시작하면서 글쓰기 단련을 못하는 핑곗거리가 없어졌다.
바람의 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그 소리를 되짚어 나가는 과정을 기록해 두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우선 책장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책을 읽을 때 뭔가 단서가 될만한 것들은 마크를 해두는 편인데, 마크만 해두고 한 번도 다시 돌아보지 않은 책들이 마음에 걸렸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곱씹어 보지 못했지만, 어떤 마음으로 구절을 체크를 해두었는지 생각해 낼 수 있다면 아마도 바람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미뢰 세포들이 살아나지 않을까?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중
"... 자연을 찬탄한다는 관념 자체는, 빙하나 사막이나 폭포 앞에서 종교적인 경외심을 느낀다는 것은, 우주의 힘에 비해 인간이 왜소하고 미약한 존재임을 느끼는 것과 관련이 깊다. 달이 아름다운 건 우리가 그곳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바다가 장엄한 것은 우리가 그곳을 무사히 건넌다는 확신을 절대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지어 꽃을 보는 즐거움도 그런 식의 신비감이 있기에 가능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자연에 대한 인간의 힘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 원자탄을 쓰면 우리는 말 그대로 산을 옮길 수 있다. 심지어 극지방의 빙상을 녹이고 사하라 사막에 물을 댐으로써 지구의 기후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스윙 음악보다 새소리를 더 좋아하는 데에는, 온 지표면을 인공 태양등이 넘치는 '아우토반'망으로 덮어버리기보다 여기저기 야생 지를 좀 남겨뒀으면 하고 바라는 데에는 어딘가 감상적이고 반 계몽적인 구석이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건, 인간이 물질세계는 탐사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탐사는 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 때문이다. 행락이란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 중 상당수는 의식을 파괴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인간이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면 인간으로서 잘 산다는 것이 단순히 일을 하지 않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등 아래서 녹음된 음악만 듣고 사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에겐 온기가, 사회가, 여유가, 안락이, 안전이 필요하다. 또 고독도, 창조적인 작업도, 경이감도 필요하다. 그런 걸 알게 되면 인간은, 언제나 어떤 것이 자신을 인간적으로 만드는지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의 기준을 적용하여 과학과 산업화의 산물을 선별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지고의 행복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포커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한꺼번에 하는 게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울러 삶이 점점 더 기계화되는 현실에서 민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가, 옛것을 선호하는 감상적 취향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십분 정당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의 수많은 발명품들은 인간의 의식을 약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며, 대체로 인간을 가축에 더 가까운 쪽으로 몰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너른 빈터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