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를 찾은 건 오랜만의 일이다.
턱을 벌릴 때마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 것은 반 년도 더 넘었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병원 진료를 미뤄왔다. 귀찮은 건 둘째 치고 의사에게 진단을 받고 병명을 확인하는 순간 정말 환자가 되어버리는 느낌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덩이가 굴러가는 소리는 날이 갈수록 점점 커졌고, 모처럼의 평일 휴무일에 강남역 근처의 유명한 치과를 찾았다.
완전 예약제인 것도 모른 채 나는 동네 의원에서처럼 차트에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고 널찍한 소파에 앉아 주위를 살폈다. 치과라기보다는 미술관 내 대기실 같았다. 병적으로 도배된 흰색 페인트며 제각기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소파들, 구멍 뚫린 벽과 손잡이 없는 문까지. 멀리서 들려오는 회전날의 비명만이 이곳이 치과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간호사가 이름을 불렀고 나는 푹 꺼진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새하얀 간호복을 입은 간호사는 엉거주춤 일어서는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소매를 잡아끌며 나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는 옆자리에 바투 앉아 예약을 하고 오지 않아서 새로 예약을 잡아주겠다고 말하며 차트를 넘겼다. 동네 의원만 다니던 나로서는 과한 친절이 불편했다. 간호사는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나를 붙잡으며 상담이라도 받고 가라며 계속해서 설득했다. 나는 "강남식 친절"에 한번 넘어가 주기로 했다.
소리가 나는 턱은 예상외로 별 탈이 없었다.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술이나 치료를 할 만큼 심각한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 의사의 소견이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의례상 치아를 한번 훑어봤는데 충치가 네 개나 발견됐다. 그중에서도 어금니와 어금니 사이에 생긴 충치는 깊은 곳에 위치한 데다 기구가 닿지도 않아 치아를 ㄱ자로 절제한 뒤 다른 재료로 빈 공간을 메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충치가 신경 쪽으로 걷잡을 수없이 뻗어나갈 것이라는 "의사식 경고"와 함께 그는 55만 원이라는 구체적인 금액까지 제시했다.
"원래는 60만 원인데 환자 분만 특별히 5만 원 빼 드리는 거예요."
내가 어딜 봐서 특별하다는 걸까. 예약도 안 하고 뻔뻔하게 소파에 앉아 있어서? 턱관절 치료를 받으러 왔다가 충치 치료하고 나가는 모습이 우스워서? 강남역에 있는 치과까지 와서 "고작" 55만 원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내가 한심해 보여서? 그것이 선심 쓰는 척 환자의 지갑을 열려는 빤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333 원칙을 멀리 한 나는 침대에 입을 벌리고 누울 수밖에 없었다.
바로 어젯밤까지도 나의 단짠단짠을 도와주던 치아(였던 것)는 공사장의 벽돌처럼 썰려나갔다. 마취를 했기 때문에 물리적 통증은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잠시 후 안내 데스크에서 지불할 55만 원이라는 거액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바가지를 맞은 것이 분명했지만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었다.
치료가 끝나고 긴 직사각형 구멍이 뻥 뚫린 어금니를 혀로 가만히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혹은 내가 잘 아는 누군가에게 상처 준 일을 지금 이렇게 갚고 있는 중이라고. 마주하지 않은 채 도망쳐 버린 순간들에 대해 하늘이 벌금형을 내린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동안 내가 저질렀던 일들을 하나둘씩 반추하며 55만 원에 해당하는 죄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일시불 체크카드로 죗값을 결제했다. 면제부라고 생각하니 55만 원이라는 금액이 저렴하게까지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지끈거리던 머리도 단 것을 먹은 것처럼 차분해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혹시 부모님이 내 명의로 들어 둔 치과 보험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끈적이는 음식을 먹지 말라는 의사의 충고가 떠오른 것은 솜사탕을 한입 크게 베어 문 직후였다. 나는 황급히 혀를 굴려 치료를 받지 않은 쪽 볼로 솜사탕을 밀어 넣었지만 이미 끈적이는 실타래가 반대쪽 치아에 들러붙었다. 혀에 힘을 빼고 살살 녹이려 했지만 그럴수록 솜사탕은 더 빨리 녹으며 임시로 메워놓은 치아의 틈으로 스며들어갔다.
끈적이는 치아는 포기하고 손이나 닦을 요량으로 휴지를 찾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솜사탕 값으로 건넸던 만 원이 그대로 있었다. 게다가 잔돈으로 거슬러 받은 육천 원도 반대편 주머니에 있었다. 돈 제대로 준 거 맞지? 남자가 몇 번이나 여자에게 물었던 기억이 났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솜사탕을 실은 자전거가 이쪽을 향해 달려올 것만 같았다. 나는 앞만 보며 강변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취가 서서히 풀리며 어금니가 시큰거렸다. 구멍으로 바람이 계속해서 들어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