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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랑 Feb 12. 2022

만약 ... 했더라면

책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오피스텔에  적이 있었다. 내가 사는 오피스텔 바로 , , 대각선,  넘어,  넘어 넘어까지 모두 오피스텔이었다. 흡사 오피스텔로 이뤄진 아파트 단지 같은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역 거의 모든 오피스텔 이름에는 아이파크, 푸르지오  아파트 브랜드명이 붙여져 있었다.


한 동의 오피스텔에 최소 500여 세대, 많게는 1,000여 세대가 훌쩍 넘게 살고 있었다. 세대수만큼 창문이 나 있으므로 한 동의 오피스텔에는 수 백 개의 창이 거의 똑같은 크기와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대체로 원룸이니 거실, 베란다, 큰 방, 작은 방 등 다른 구성의 창문이 불필요 했다. 멀리서 보면 수용소 같기도 했다.


그리하여 내 집은 '창문뷰'였다. 대로를 사이로 나란히 마주한 다른 오피스텔 건물에 난 무수한 창문들을 바라보며 멍 때리는 일이 잦았다.


그 집에 처음 살기 시작했을 때, 오랜 연애를 막 끝낸 후였다. 사귄 시간의 두 배가 지나야 그 사람을 잊는다는 통념에 기반한다면 환갑이 가까워야 그를 잊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긴 연애였다. 잊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잊을 수 있을 거란 기대 혹은 잊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느 날처럼 멍하니 수많은 창문을 바라보다 창문을 열어 허공에 손을 뻗어보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래 저 창문의 개수만큼 서로 다른 사람이 각기 다른 삶을 살겠구나라는 당연한 사실에 다다랐다. 그러다 문득 가정을 시작했다.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지금 이 순간 동시에 N명의 내가 N개의 삶을 살고 있고 저 창문마다 내가 산다는 가정(if)말이다.


첫 번째 창문에는 그와 수순대로 함께 사는 삶일 것이었다. 다른 창에는 학창 시절 내내 품던 꿈을 마침내 이룬 삶이, 또 다른 창에는 한창 재미 붙이다 그만둔 운동을 계속해 결국 탁월한 몸매가 되는 그런 삶이기도 했다.


그전까지 내게 상상이란 대체로 기린을 타고 출근하고, 코끼리와 친구가 되는 종류였다. 비현실에 기반을 두며 동물들의 정령이 되는 그런 '아바타' 영화 느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상 최대의 깊은 슬픔을 보유할 때라 현실을 기반한 전개가 가능했던 듯하다.



책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를 읽으며 묘한 만족감이 일었다. 창문을 바라보며 수행했던 내 상상을 누군가는 책으로 풀어냈다. 아는 작가도 아닌데 친밀감이 형성되며 '유노왓암생~'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살을 실행한 주인공은 미드나잇에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존재하는 도서관에 들어선다. 그곳에는 주인공이 살았을 수도 있는 무수한 삶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대입, 결혼 등 대놓고 중요한 선택부터 사소한 선택까지 무수히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삶이 모두 경우의 수로 풀어놓인 것이다. 유명 연예인과 사귀고 심지어 본인이 차 버리는 삶도 있고, 셀럽이 되는, 올림픽 출전 선수가 되는, 결혼하는, 아이를 낳는, 결혼하지 않는 삶도 있었다.


주인공은 자신이 생각했을 때, 가장 후회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그 반대 결정을 했을 때의 삶을 살아본다.

그 삶의 작용, 반작용을 경험하며 순도 100%의 완벽한 행복의 존재란 환상임을 느끼게 된다. 주인공이 경험하는 가정(if)의 삶을 따라가며 자연스레 내 선택과 가정들을 떠올리게 된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를 읽으며 나는 이런 문장들에 밑줄을 그었다.



삶의 의미만 찾다가는
제대로 살지 못할 겁니다.

-

어떤 후회는
전혀 사실에 기반하지 않는다.

-

체스를 두는 데 올바른 법은 없어.
그저 많은 방법이 있을 뿐이야.

-

(도서관의 책들은
절대 바닥날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그건 네가 살아볼 수 있는 삶이
여전히 많다는 뜻...
네 가능성은 절대 바닥날 수 없단다."

-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

-

새로운 삶을 맛볼 때마다
상상력의 한계가 조금씩 넓어진다.

-

(그녀가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들은)
그녀가 추락하지 않게 받쳐주는
사랑의 그물망

-

-하고 싶다는 흥미로운 말이다.
그 말은 결핍을 의미




이 책은 궁극에 내가 딛고 있는 이 순간, 백지로 놓인 내 지금 이 가진 무한한 힘을 느끼게 한다. 친절하게 그리고 사랑하며 채워나가는 삶에 가정(if)보다 온전한 행복이 있음을 말해준다.


내 집에서 창문 뷰를 바라보며 잠시 펼쳤던 상상은 몇 차례 지속되지 못했다. 아마도 지난 일에 가정을 잘 붙이지 않는 본래의 성향이나 기질이 금세 발현되었기 때문일 거다. 내 반짝이는 시절이 오롯이 담겨 있는 사랑이라 애틋하고 그립고 소중하고 헛헛하지만 그것이 후회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럴 수도 있을 과학적 가정을, 양자역학적(?)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일 뿐이다.

만약의 가정들을 흘려보낸 뒤 지금의 나는 과학적 가능성들에게 기도하듯 바란다. "어떤 삶을 살든 행복해. 나도 그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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