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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랑 Jun 01. 2019

안 씻은 쌀로 지은 밥

생애 첫 밥 짓기

이젠 씻어 먹어요


고백하건대 나는 한 번도... 밥을 해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없으면 아빠가, 아빠가 없으면 오빠가 해줬다. 없으면 안 먹는 타입인데 다정하게 챙겨주는 사람이 셋이나 있으니 내 차례까지 올리 만무했다.


나의 독립 거주가 가시화되자 엄마는 가장 먼저 밥솥을 사야 한다고 했다. 내 요리스펙에 30만 원짜리 쿠쿠는 사치였다. 그럼에도 엄마는 단호했다. 밥솥은 반드시 제대로 된 것을 사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엄마가 담아준 잡곡들, 엄마가 사준 밥솥을 들고 나만의 집으로 입성했다. 마치 창과 방패를 모두 쥔 기분. 15분 만에 쾌속으로 맛있는 밥을 짓는다는 쿠쿠와 함께이니 굶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밥을 하던 날, 생각보다 쉬운 난이도에 놀랐다. ‘밥을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무거웠을 뿐, 실제 밥을 만드는 행위에 내 노고는 크게 들지 않았다. 잡곡 통에서 밥솥으로 쌀을 쏟아내면 끝이었다.


나도 먹고, 친구도 해먹이고 날로 자부심이 뿜뿜했다. 본가로 돌아가 후일담을 풀었다. 정확한 계량으로 잡곡과 물을 거의 동시에 부음으로써 내가 딱 좋아하는 정도의 꼬들거림을 유지한다고 자랑했다. 곰곰이 듣던 가족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쌀이 바로 밥솥으로 간다고? 안 씻어?


가족은 박장대소했다. 잡곡의 고소함이 그대로 유지된 맛이었겠다며, 배만 안 아프면 된 거라고 놀렸다. 충격이었다. 모름지기 쌀은 씻어먹어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당연히 엄마가 준 쌀은 모두 씻겨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취사 버튼만 누르면 되도록 밑작업이 다 되어있으리라 믿었다. 의심 아니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엄마가 그간 내게 건넨 것은 98% 이상 완성돼 있었다. 헌 양말은 새 것이 되어 돌아오고, 봉지 속 사과는 바로 입에 넣을 수 있었다. 제아무리 뜨거운 차도 바로 삼킬 수 있는 온도였고, 방은 늘 잠자기 적절했다.


나는 혼자서도 다 할 수 있다고. 이젠 독립할 나이가 되고도 남았다고. 나는 이러이러한 일을 하며, 저러저러한 인정을 받는 사회인이고 어쩌고 저쩌고... 목청을 있는 대로 높여가며 성질도 내고, 부르짖기도 한 독립이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의식주의 대부분을 엄마에게서 빌어 살아가는 인간이었다.


아마 가족들은 평생 나를 놀려먹을 것이다. 마치 두 살 때 벌에 쏘인 얘기를 아직까지 하고, 구연동화 대회에서 몽땅 까먹고 울다 내려온 얘기를 어제 일처럼 말하니까.


아직은 엄마가 내게 해줄게 많고 나는 여전히 모르는 게 많은 게 싫지만은 않다. 물론 이제 나는 쌀을 여섯 번이나 씻는다. 하지만... 사실 씻어야 한다는 허들이 하나 더 생긴 후로는 어쩐지 해먹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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