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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Jan 04. 2020

'토끼 울타리'를 넘어서

백인들에게 짓밟힌 아픈 역사를 간직한 애버리지니의 땅

 호주 하면 흔히 장미처럼 아름다운 시드니, 멜버른, 브리즈번, 골드 코스트, 그리고 서호주의 그림 같은 도시 퍼스를 떠 올리기 쉽다. 물론 여행자라면 그런 아름다운 도시에서 휴식을 취하며 지친 심신을 쉬고 싶으리라. 나 역시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아름다움 뒤에는 마치 장미의 가시에 찔린 것 같은 아픔의 역사가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바로 호주가 그렇다. 겉으로는 평화롭게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고향을 잃고 신음하고 있는 호주 원주민 애버리지니(Aborigine)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호주 대륙에서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이다.  어디 이런 일이 호주 뿐인가? 아메리카에는 원주민 인디언, 그리고 뉴질랜드에는 마오리족도 정복자의 탄압에 짓밟혀 고통을 당하며 사라져 가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12월 29일 12시 15분, 지상에서 가장 고립된 도시 퍼스를 이륙한 비행기는 호주 아웃 백의 붉은 사막 상공을 지나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붉은 사막! 호주 대륙이 우리나라 남한의 100배나 큰 대륙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호주 내륙의 심장부인 울루루를 향해 골든 아웃 백으로 들어갈수록 땅의 색깔은 점점 붉어졌다. 


태초의 원시 땅이 저랬을까?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정오여서인지 구름 한 점 없는 사막은 더욱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사막을 바라보면서 나는 문득 무명의 원주민 작가 도리스 필킹톤이 쓴 '토끼 울타리(Rabbit-Proof Fence)'를 떠올랐다. 


백인들에 의해 둘러쳐진  '토끼 울타리'


이 소설은 시드니 출신 필립 노이스 감독이 '토끼 울타리(Rabbit-Proof Fence)'란 제목으로 영화화되면서 일약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1930년대에 영국 식민정부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여성들과 백인 남성들 사이에 태어난 혼혈 아동을 엄마로부터 강제로 훔쳐 와서 수용소 등 열악한 환경에 집단으로 거주시켰다. 그런 다음 기독교로 개종시켜 남자아이들은 목동이나 막일꾼으로, 여자 아이들은 하녀로 훈련시켜 호주 사회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원주민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담고 있다.


'토끼 울타리'는 필킹턴 여사가 그녀의 모친인 몰리(Molly Carig)가 직접 체험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이를 소설화한 것이다. 소설은 10대 전후의 세 자매(여덟 살 데이지, 열 살 그레이시, 열네 살 몰리)가 서호주 북부에 위치한 무어 강 원주민 아동 격리 수용소를 탈출하여 지갈롱(Jigalong)까지 1,500마일(2,400km)의 머나먼 길을 6주 동안 걸어서 가족의 품에 안기는 감동적인 체험을 전하고 있다. 세 자매의 고된 여행은 역사적인 사건일 분만 아니라, 1930년대에 세 명의 어린 원주민 소녀들이 해냈다는 점에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사건 중의 하나이다. 


원주민의 딸 세 자매가 그들의 고향 지갈롱에서 퍼스근처까지 강제로 이송되어 다시 지갈롱으로 돌아간 경로(참조:토끼 울타리)


'토끼 울타리'는 원래 백인 목장 주들이 쳐 놓은 철조망 울타리이지만, 어린 세 자매가 토끼처럼 이 울타리를 이정표 삼아 거친 불모의 사막을 횡단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토끼 울타리는 토착민 애버리지니의 소유였던 거대한 호주 대륙이 백인들에 의해 무단 점거되어 부당하게 울타리가 쳐진 '빼앗긴 땅'을 암시하고 있다. 지금도 애버리지니들은 자신들의 빼앗긴 땅에서 알코올 중독과 가난에 시달리며 방황을 하고 있다. 


창밖에는 마치 대륙의 심장처럼 땅이 점점 더 붉어졌다. 군데군데 하얀 소금호수도 보였다. 어린 세 자매가 자유를 찾아서 2400km라는 죽음의 순례길을 걸어서 갔을 황무지를 나는 비행기라는 문명의 이기를 타고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비행기는 '토끼 울타리'를 넘어서 오아시스의 도시 앨리스 스프링스에 접근하고 있었다. 


"저기 울루루가 보인다!"


누군가 창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그곳에는 호주의 원주민 애버리지니들이 가장 아끼는 성소, 울루루가 황량한 벌판 위에 우뚝 솟아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울루루는 내 주먹 크기의 붉은 바위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섬처럼 고립된 건조한 붉은 평원에 우뚝 서 있는 울루루는 거대한 갈색 낙타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인간의 오장육부에 있는 간의 형태처럼 보이기도 했다. 또 다른 방향에서 보면 펑퍼짐한 배에 붙어 있는 배꼽의 돌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애버리지니들의 성소 '울루루'


울루루는 원주민 애버리지니 어로 '그늘이 지난 장소'란 뜻을 지니고 있다. 펀펀한 사막에 그늘이 질만한 장소는 이 바위밖에 없으리라. 그런데 우연히도 이 바위 덩어리는 호주 대륙의 한가운데 있다. 시드니에서 2804km, 퍼스 3595km, 브리즈번 2290km, 다윈 1935km 등 대륙의 외곽의 도시로부터 멀고 먼  오지(Outback)에 위치하고 있는 울루루는 호주 대륙의 중심에 솟아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배꼽 크기만 한 바위 덩어리를 '세상의 중심'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퍼스에서  앨리스 스프링스로 가는 비행기에서 나는 세 번 놀랐다. 호주 대륙의 방대함에 놀랐고, 끝없이 펼쳐진 붉은 사막, 그리고 산이 없는 대지라는 사실에  놀랐다. 이미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과 중국의 타클라마칸 사막, 중동의 아라비아 사막, 미국의 애리조나 사막,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 몽고의  고비 사막 등을 여행을 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호주 대륙의 사막은 별로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울루루 상공을 지나자 비행기가 곧 앨리스 스프링스 공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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