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를 버림으로
영혼을 얻을 수 있을까?

― 랑무스 천장터에서 마주한 생과 사의 경계

by 찰라


천장터에 다가서기 전, 죽음에 대한 의문들



랑무스 빈관 지배인은 내일 아침에도 천장이 있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외부인이 보기를 원치 않으므로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꼭 천장의례를 보고 싶으면 가족들의 허락을 받는 것이 예의라고 전했다.


이어서 빈관 지배인은 티베트의 천장 풍습을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육체는 영혼이 잠시 의지하는 그릇이며 영혼이 떠나면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것. 그래서 티베트에서는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우거나, 물에 띄우는 대신 육신을 독수리에게 보시한다. 독수리의 날개에 실어 저 높은 하늘로 되돌려 보내면, 영혼은 더 빨리, 더 멀리, 더 밝은 곳으로 가서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날 수 있다고 믿는다.

부처가 굶주린 호랑이에게 몸을 내주던 사신공덕처럼, 파드마삼바바가 공동묘지에서 각성하던 순간처럼,

티베트인은 삶의 마지막을 자연과 존재에게 돌려주는 의식으로 완성한다.


또한 해발 4,000m가 넘는 티베트의 혹독한 자연환경에서는 땅은 얼음처럼 굳어 있어 삽으로 파기도 어렵고, 나무도 자라지 않아 화장을 할 수도 없다. 따라서 티베트 자연은 인간의 죽음을 땅에 매장을 하는 것과 화장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독수리에게 보시하여 독수리의 거대한 날개에 죽은 이를 하늘로 돌려보내는 천장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랑무스 천장터로 가는 길 풍경. 망자의 피 묻은 옷이 찢겨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천장의식 진행은 사람이 죽으면, 먼저 시신의 옷을 모두 벗겨 흰 천으로 전신을 감싸고 마대로 포장을 한다. 유해는 3일 동안 집안에 모셔 놓았다가 4일째 새벽에 미리 예약을 해둔 돔덴(Domden, 천장사天葬師)이 와서 시신을 들 것으로 가져간다. 천장터까지 가는 동안 멈추거나 쉬어서는 안 된다.


천장터에 도착하여 천장사 연기를 피우면, 이를 신호로 독수리 떼가 몰려온다. 날개 너비 1m가 넘는 거대한 독수리들이다. 냄새에 이끌린 독수리는 도착하자마자 달려들지 않는다. 독수리 떼는 천장터 주변에 모여 앉아 시신이 올라오기를 기다린다.


라마승들이 죽은 이의 영혼을 달래는 독경을 하는 동안 두 명의 천장사가 자루에 담긴 시신을 천장터에 올려놓고, 먼저 시신의 배를 가르고 장기를 꺼내 독수리에게 던지면, 독수리들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삼켜버린다. 이어서 시신을 도끼와 칼로 독수리가 먹기 좋게 토막을 내어 놓으면 독수리들이 몰려들어 눈 깜짝할 사이에 깨끗이 먹어치운다. 남은 두개골과 뼈까지 잘게 부숴 보리가루를 뿌린 후 그 마지막 가루까지 독수리가 먹어치우면, 천장식은 막을 내린다.



외부인의 눈에 천장은 잔인하게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산지대인 티베트의 자연환경과 불교철학에 기반을 둔 신앙에서 비롯된 천장은, 인간이 자연에서 돌아와 자연으로 돌려주는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간주한다. 티베트인들에게 금생의 삶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윤회를 믿는 그들에겐 죽음은 끝이 아니라, 낡은 육신을 버리고 다시 태어나는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이다.


빈관지배인의 말을 들으면서도 내 마음 한쪽에서는 묵직한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 인간의 마지막이 그렇게까지 비워져야 하는 걸까?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했다. 독일인 피터의 권유로 천장의식을 지켜보기 위해 찾아온 랑무스. 아내는 천장의식에 대한 내용을 듣고 너무 무서워 숙소에 남아 있겠다고 했다.


피터와 나는 빈관 지배인의 충고에 따라 천장식이 끝날 무렵 마을 뒷산에 있는 천장터로 걸어 올라갔다. 해발 3,500미터 고원의 바람은 살아 있는 자에게는 생을, 죽은 자에게는 죽음을 속삭였다.



천장터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왔다. 사방이 을씨년스러워지고 몸이 으스스해졌다. 내 마음은 두려움으로 고원의 하늘처럼 낮게 가라앉았다. 난치병 아내를 데리고 멀고 먼 라싸로 향하는 길—그 길에 삶과 죽음의 경계선인 천장터로 가는 마음은 무거웠다. 독수리에게 육체를 보시하면, 정말 영혼이 살아서 하늘로 날아가는가? 그동안 나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었다.


삶은 어디까지가 삶인가.

죽음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죽음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영혼은 존재하는가.

나는 육체인가, 영혼인가.


이 질문들은 이미 천장터에 도착하기 전부터

내 안에서 오랜 번개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독수리가 먹는 것은 육체인가, 삶의 무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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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의식이 치러진 랑무스의 천장터 모습


천장터에 다다르자 사진 속 풍경이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냄새와 함께 바람으로 밀려왔다. 이미 천장식이 치러진 자리에는 바람에 해진 타르초가 망자의 혼처럼 너덜거리고, 땅바닥에는 피가 스며든 옷자락과 색색의 천들이 마치 영혼의 파편처럼 흩어져 있었다.


녹슨 도끼,

무딘 칼날,

피 묻은 천조각,

산산이 부서진 뼈 조각…


나는 한 발짝 내딛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생경한 공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이 흔들리는 두려움이었다. 천주교 신자인 피터는 담담히 사진을 찍었지만 나는 자꾸만 땅을 바라보았다. 피와 뼈, 옷가지와 바람… 그 위로 묵묵히 선회하는 독수리의 그림자.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게 죽음인가?”


빈관 지배인이 설명해 준 천장식의 모습을 상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천장터의 바람 속에서 나는 느꼈다. 독수리가 먹는 것은 그저 시신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이생에서 감당하던 모든 삶의 무게, 모든 고통, 욕망, 모든 집착이라는 것을.


사람은 야크를 먹고,

야크는 풀을 먹고,

풀은 땅을 먹고,

독수리는 사람을 먹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이 윤회의 생태적 순환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라마교에서는 죽음도 삶의 일부로 본다. 끝없이 윤회하는 영혼은 삶과 죽음의 구별이 따로 없다는 것. 육신은 눈에 보였다가 보이지 않을 뿐이고, 당초부터 보이지 않는 영혼은 어디엔가 다시 사람이나 동물의 몸으로 윤회하여 살고 있다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죽어보지 않고서는 풀리지 않는 화두다.


천장터에서 내려오는 길, 야크 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독수리가 그 위를 선회했다. 그 풍경은 한 줄의 진실을 말했다.


죽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돌아감이다.

영혼은 죽지 않으며, 다만 다음 생을 향해 흘러갈 뿐이다.


죽음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죽음은 단지

우리가 빌려 쓰던 육신을

자연에게 돌려주는 시간일 뿐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는

삶 또한

누구도 높고 낮음이 없다.



갑자기 번개가 치고 천둥이 쿵쾅 거리며 으르렁댔다. 곧이어 장대 같은 소낙비가 쏟아져 내렸다. 비를 피하기 위해 달려가자 금방 숨이 찼다. 여긴, 3500m 고도란 걸 잊어 먹었네. 허겁지겁 마을에 도착하니 햇빛이 먹구름을 뚫고 레드마운틴 위에 신비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그 위로 사원과 너와집이 겹쳐진다. 삶은 날씨와 같은 것일까?


까마귀 울어대는 들판을 걸어 내려오는데 라마승들이 가사장삼을 휘날리며 걸어왔다. 스님들의 미소는 잔잔하고 따뜻했다. 시냇물이 흐르는 마을에 돌아오니 비로소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아내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늦었어요?"

"숨이 차서 빨리 걸을 수가 있어야지. 천천히 걷다 보니 좀 늦었어요."


저녁을 먹고 나니 갑자기 피로가 엄습해 왔다. 내일 아침을 생각해서 일찍 잠을 자기로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천둥 번개 소리에 쉽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천장터와 도끼, 독수리와 야크가 자꾸만 눈에 어른 거렸다. 나는 가만히 아내의 손을 잡았다.


그 따뜻함이,

그 연약한 숨소리가,

그 작은 떨림이

무엇보다 선명하게 말했다.


“사랑은 언제나 옳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살아 있다.”


내가 아내와 함께 걸어온 길은 죽음을 향한 길이 아니라 삶을 끝까지 품으려는 길이었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 사이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천장터는 내게 한 가지를 가르쳤다. 영혼은 육체를 버려서 얻는 것이 아니라, 육체라는 집착을 내려놓을 때 이미 자유롭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 독수리는 우리의 몸을 먹지만 우리의 삶을 먹지 못한다.


삶은 이미

사랑한 만큼,

기도한 만큼,

순례한 만큼

이 땅과 하늘에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음 생을 향해 열어둔 고요한 문이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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