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 초모랑마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
시가체 파머스 게스트하우스의 도미토리는 한 방에 다섯 명이 함께 자는 공간이었다. 1인당 숙박비는 20위안.
창고처럼 소박한 방이었지만 우리는 누에고치 속에 든 것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 7시,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숨이 먼저 나를 깨웠다.
몸은 누워 있는데
호흡은 이미 밖으로 나가 있었다.
고원에서는 아침도
천천히 시작해야 한다.
아내와 나는 마지막 남은 농심 신라면을 끓여 아침을 먹었다. 티베트 오지에서 먹는 라면은 이상하게도 늘 꿀맛이다.
“라면을 마지막으로 다 먹고 나니 어쩐지 서운하네요.”
아내는 마지막 라면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사소한 이별 하나에도 마음이 반응한다는 건 아직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라면이 아쉬운 게 아니라
이 아침이 끝나는 게 아쉬웠다.
오늘은 멀리 가야 하는 날이라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함께 지프를 탄 하선생과 양군은 시가체 성곽을 오르겠다고 나갔다. 그러나 아내와 나는 휴식이 필요했다. 그냥 걷기만 해도 숨이 찬데 가파른 성곽을 오른다는 것은 무리로 느껴졌다.
걷지 않아도 숨이 찼다.
오르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높은 곳에 와 있었다.
오늘은 쉬는 것도
중요한 일정이었다.
더구나 오늘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긴 여정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라싸에서 산 샌들로 갈아 신으니 발이 한결 가벼워졌다. 해발 4,000미터의 고지대이지만 산을 오르지 않으면
놀랍게도 평지는 평평하다. 다만 숨이 차 빨리 걸을 수 없을 뿐이다. 여기서는 빨리 걷지 않는 사람이 뒤처지는 게 아니다. 숨을 지키는 사람이 끝까지 간다.
점심 무렵, 게스트하우스 근처에서 툭빠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한 뒤 우리는 다시 깡파의 고물 랜드로버 지프에 올랐다. 시가체를 벗어나자 암갈색 산자락 아래 뜻밖에도 푸른 초원이 펼쳐졌다. 보리나 밀을 심은 밭일 것이다. ‘시가체’가 ‘뜻한 대로 이뤄지는 지고한 정원’이라는 뜻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다. 이곳은 티베트 서남부의 농축산물 집산지였다.
그런데, 지프가 심상치 않았다. 운전사 깡빠(彊巴旦增)가 모는 고물차는 자꾸만 시동이 꺼졌다. 그럴 때마다 그는 보닛을 열고 아무렇지 않게 차를 손본다.
“깡파, 괜찮겠어?”
“노 프로블렘!”
그의 태도는 시종일관 여유롭다. 이 막막한 오지에서 차가 고장 나면 오도 가도 못할 텐데도 말이다.
출발한 지 세 시간쯤 지났을 때, 우리는 허허벌판에서 밥을 짓고 있는 유목민 가족을 만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소녀. 세 사람은 보따리 짐을 한쪽에 묶어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마도 전날 밤, 이곳에서 야영을 한 모양이었다.
물통 하나, 까맣게 그을린 녹슨 주전자와 냄비 하나. 그것이 그들 살림의 전부였다. 소녀는 마른 야크 똥을 모아 돌을 둥글게 쌓은 화덕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가죽으로 만든 손풍로를 눌렀다 풀며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 옛날 시골에서 손풍로를 돌려 쌀겨에 불을 붙이던 향수가 떠올랐다. 나는 마치 먼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하고 있었다. 태초의 사람들이 불을 다루던 방식도 아마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해발 4,000미터의 하늘길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니, 내 상식으로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갈까?’ 그 질문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나 곧 알게 되었다. 그 질문은 이 풍경 앞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의 표정은 놀랍도록 편안했다.
처음에는
불이 너무 작아 보였다.
이 불로 밥이 될까,
이 추위에 괜찮을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곁에 앉아 있으니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불의 크기가 아니라
사람의 온기가
체온을 정하는 것 같았다.
소녀는 가죽 손풍로를 아무렇지 않게 다루고 있었다. 가죽주머니를 부풀린 뒤 엄지와 검지로 끈을 오므리면
바람이 태어난다. 전기도, 연료도, 설명서도 없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방식,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다가가 말을 걸었다.
“따시델렉.”
("모든 일이 평안하고 복되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인사말은 티베트 사람들에게 단순한 인사가 아니다. 안부이자 축원이고, 만남의 문을 여는 기도이다.)
내다 웃으며 인사를 건네며, 풍로를 한번 불어보고 싶다는 손짓을 하자, 소녀는 말 대신 웃으며 손풍로를 내밀었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오지 않았다. 소녀는 다시 조용히 보여준다. 그 웃음에는 가르치려는 마음도, 우월함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 하면 돼 라는 삶의 전달뿐이었다.
그 아이는
나를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
다시 한번 해 보일 뿐이었다.
설명하지 않는 친절,
재촉하지 않는 배려.
그 미소 앞에서
나는 괜히 숨을 고르게 되었다.
나는 그 손놀림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우리는 너무 많은 도구를 가지고 너무 적은 기술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보따리 몇 개, 주전자 하나, 냄비 하나. 그 단출한 살림 앞에서도 그들은 전혀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보다 더 가벼워 보였다.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내려놓을 것이 없어서 저렇게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저 얼굴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졌다. 아마 다시는 같은 표정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우리는 잠시 말을 잃은 채 그들이 밥을 짓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나는 유목민 가족에게 합장을 하며 인사를 했다.
“툭제체.”
("고맙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감사 인사가 아니다. "당신의 큰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란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유목민 소녀와 가족도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칼레페.”
("안녕히 가세요" 칼레페는 해어질 때 인사말로 "이 길이 당신의 해치지 않기를 당신이 무사히 다음 생의 자리까지 가기를"이란 깊은 뜻이 숨어 있다.
그 손짓이 먼지 낀 하늘 위에 오래 남아 있었다. 마치 초모랑마로 가는 길목에 보이지 않는 기도 깃발 하나를
달아놓은 것처럼. 저 손짓이 작별이 아니라 축복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무사히 이 길을 건너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이 우리에게 오늘 하루의 양식이 되었다. 우리는 다시 지프에 올랐다. 엔진은 여전히 불안했고 길은 여전히 멀었다. 그러나 마음 한쪽은 분명히 가벼워져 있었다. 이 길은 정상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사람답게 낮아지는 길이었다.
우리는 너무 많이 가져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거의 가지지 않기에 이미 충분해 보였다. 밀라레파가 동굴에서 쐐기풀로 간을 하고 양념을 했다는 말이 이 날따라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극단이 아니라 자유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티베트를 여행하는 동안 아내와 나는 작은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보리빵 하나, 야크차 한 잔, 혹은 툭빠 한 그릇. 하루 식비는 우리 돈으로 500원에서 2,000원 남짓. 티베트 순례자들처럼 오체투지는 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의 고행 길을 걷고 있었다. 어쩌면 생애에서 가장 힘든 순례길이 될지도 모른다.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유목민 가족의 모습이 하늘에 오래 걸려 있었다. 영원히 잊지 못할 따뜻한 장면이었다.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났다. 이 길은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아니라 마음을 내려놓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