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고원에 울려 퍼지는
운전사 깡파의 콧노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에서

by 찰라


마음을 안정시키는 운전사 깡파의 콧노래


운전사 깡파는 운전대를 잡으면 콧노래를 부른다.
고물 자동차가 삐걱대며 말썽을 부려도, 고원의 바람이 차창을 흔들어도 그의 콧노래는 끊기지 않는다. 고생을 모르는 사람처럼, 아니—고생을 이미 건너온 사람처럼. 구릿빛으로 그을린 강인한 얼굴, 산 듯한 선글라스를 쓴 그의 모습에는 이상하리만큼 가벼운 낙천이 배어 있다.


라싸에서 에베레스트를 넘어 네팔 국경까지, 무려 890킬로미터.
길은 민망할 만큼 험하고 거칠다. 비포장 도로는 울퉁불퉁하고, 천길 낭떠러지가 차창 바로 곁으로 따라붙는다. 산사태가 나 돌을 치워야 하는 일도 흔하다. 그 험로를 깡파는 낡은 지프 한 대로 오르내리며 생계를 이어간다. 우리의 생명은 사실상 그의 손에 쥐어진 운전대 위에 놓여 있다.


나는 무심코 아내의 얼굴을 본다.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눈빛. 고원의 햇빛에 가늘게 찡그린 눈, 그러나 두려움은 없다. 아내는 길을 보지 않는다. 대신 사람을 본다. 운전대를 잡은 깡파의 어깨, 콧노래가 흐르는 그의 호흡을 읽듯 조용히 앉아 있다. 아내는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세상을 건너왔다. 상황이 아니라, 태도를 보고 안심하는 사람이다.

깡파는 노래를 부르다 말고 가끔 씩 웃는다.


그 웃음에는 계산도, 조급함도 없다. 윗입술에 기른 콧수염마저 이 길을 오래 달려온 사람의 훈장처럼 보인다. 아내는 그 콧수염을 힐끗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이 사람이라면 괜찮다’고 속으로 판단을 마친 듯이.



깡파는 내일을 걱정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을 노래로 건너가는 사람이다. 험한 길 위에서 배운 것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라는 듯이. 고물 지프는 여전히 덜컹거렸지만, 그의 콧노래가 흐르는 동안만큼은 이 길조차 조금은 덜 험해 보였다.

아내는 그 덜컹거림 속에서 잠시 눈을 감는다.


위험할수록 콧노래를 부르는 운전사 깡파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맡긴다는 표정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깨닫는다. 길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에게—무엇에게—몸을 맡기고 가는지가 삶을 결정한다는 것을.


깡파의 콧노래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아내에게는 불안한 몸을 잠시 내려놓게 하는 리듬이고, 나에게는 이 고원을 건너는 한 인간의 수행처럼 들린다. 그렇게 우리는, 노래 하나에 의지해 오늘의 험한 길을 조용히 통과하고 있었다.


이 길은 무섭지 않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한다. 절벽이 가까워도, 차가 낡아도, 몸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무서운 것은 길이 아니라 마음이 흔들릴 때라는 것을 나는 오래전에 배웠다. 저 사람의 콧노래는 나를 안심시킨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증거니까. 아내는 몸이 아프고 나는 마음이 아프지만, 이 순간만큼은 맡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우리는 살아서 이 길 위에 있고, 누군가의 호흡을 믿으며 앞으로 간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쟁기를 타고 밭을 가는 티베트 농부


메마른 고원지대를 지나자 갑자기 푸른 목초지가 펼쳐진다. 놀랍게도 푸른 가로수가 늘어서 있다. 티베트를 여행하며 처음 마주하는 풍경이다. 히말라야의 신이 흘려보낸 눈 녹은 물이 이 땅까지 내려왔기 때문이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산다. 풀이 돋고, 짐승이 모여들며, 사람이 터를 잡는다. 야크 떼와 양 떼가 유유히 길을 건너고, 사막 같은 평야 위에도 거친 풀이 살아 있다. 그 풀은 부드럽지 않다. 고원처럼 거칠고, 그러나 질기다.


해발 4,000미터의 땅에도 이렇게 평야가 있고, 초원이 있다니 놀랍다. 야크와 양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풀을 뜯고, 그 한편에서 한 농부가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있다. 그 모습이 눈길을 붙든다.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 위에 농부가 올라타 있다. 마치 쟁기를 타고 밭을 가는 것처럼 보인다.


뿔에 붉은 깃을 단 소 두 마리는 농부가 이끄는 방향으로 재빨리 걷고, 쟁기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생각보다 빠르게 평야를 가른다. 쟁기에 사람이 타면 소가 더 힘들 텐데, 농부는 왜 쟁기에 올라탄 채 밭을 가는 걸까. 잠시 더 바라보니 이유가 보인다. 그는 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쟁기 위에서 자신의 몸무게로 써레를 눌러 흙이 제대로 뒤집히도록 돕고 있었다.


이렇게 척박한 고원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히말라야의 눈 녹은 물을 끌어들여 그들은 주로 보리를 재배한다. 신이 흘린 눈물로 생명을 잇고, 그 눈물로 다시 씨앗을 키운다. 이 농법은 새로울 것이 없다. 오히려 너무 오래되어 이름조차 없는 방식, 수만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원시의 지혜다.


한동안 우리는 길가에 서서 그 농부의 쟁기질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차에 올라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흙먼지 속을 달리던 쟁기 위의 농부가 남아 있었다



티베트의 집짓기

-남녀가 함께 노래하며 삽질



자동차는 험준한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기어갔다. 벌판은 황량했다. 풀 한 포기 없이 바람만이 지나가고, 깡파는 여전히 콧노래를 부른다. 티베트 특유의 구성진 선율이 고원의 먼지 속으로 흩어진다. 차는 요동치고, 온몸이 들썩이며, 이따금 머리가 천장에 쿵~하고 부딪힌다. 장운동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정신에는 별로다. 그런데도 깡파는 태연하다. 이 길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아니 삶이 원래 이런 것이라는 듯.


티베트 고원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이 길은 이동이 아니라 수행에 가깝다. 고도는 숨을 시험하고, 풍경은 마음을 낮춘다. 도로 주변은 갈색의 산과 바위뿐이다. 깎아지른 절벽에서 돌이 굴러 떨어지는데도 깡파는 운전대를 놓지 않는다. 노련함이란 이런 것일까. 두려움을 계산하지 않는 태도.



그때 지프 앞쪽에서 사람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삽과 곡괭이를 어깨에 멘 노동자들. 도로 공사인지, 집을 짓는 일꾼들인지 모를 차림이다. 누더기 같은 옷, 아무렇게나 둘러쓴 수건, 그리고 광주리. 아이를 광주리에 담아 멘 여인도 있다. 차림은 가난했지만, 얼굴에는 웃음이 있었다. 나는 그 삽을 든 모습에서 이상할 만큼 단정한 삶을 느꼈다. 불평이 없는 얼굴. 노동이 곧 하루의 의미가 되는 얼굴.


집을 짓는 현장 옆에서 지프를 세웠다. 담장 위에는 중절모를 쓴 감독처럼 보이는 사람이 서 있고, 그 아래에서는 독특한 작업이 한창이다. 모래와 시멘트를 섞는 작업. 삽에 끈을 달아 여자가 그 끈을 잡고 앞에서 당긴다. 그러면 남자가 뒤에서 삽질을 한다. 여자들이 노래를 부르며 장단을 맞추면 남자들의 삽질도 그 리듬에 맞춰진다. 리듬과 박자가 일치하는 노래는 퍽 구성지게 들린다.


노래와 노동이 분리되지 않는다. 남녀가 반반 섞여, 몸의 고단함을 소리로 나누며 일을 한다.

이 삽질에는 투덜거림이 없다. 속도를 재촉하는 고함도 없다. 오직 박자와 호흡만 있다. 삭막한 고원에서 그 구성진 노랫소리를 듣고 있으니 문득 내가 부끄러워졌다. 순례자니 여행자니 하는 말들이 이 삽 앞에서는 모두 가벼워 보였다.



이 노래는 "삽질 노래·땅노래"라는 일종의 노동요로 한 사람이 낮고 길게 선창을 하면, 여럿이 짧고 리듬감 있게 받는다. 나는 그 노래가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았다. 이미 몸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삽이 내려갈 때마다 노래는 숨을 내쉬었고, 노래가 올라갈 때마다 삽은 다시 하늘을 향했다. 아내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말없이. 그 장면 앞에서는 설명이 오히려 무례해 보였다.




돌을 나르는 손, 침대를 밀어 올리는 손


그 순간, 나는 쐐기풀로 연명하며 수행했던 티베트의 성자, 밀라레빠를 떠올렸다. 밀라레파는 스승 마르파의 지시에 따라 집을 지었다. 스승은 그것을 허물게 했다. 다시 짓게 했고, 다시 허물게 했다. 이유는 없었다. 설명도 없었다. 다만 몸이 먼저 배워야 할 것이 있었다.


나는 오늘도 병실에서 침대를 밀어 올린다. 이유를 묻지 않는다. 어제 했던 것을 오늘 또 한다. 체온을 재고, 약을 건네고, 휠체어를 당긴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는다. 완성도 없다. 밀라레파가 돌을 나르던 손과 내가 난간을 붙드는 손 사이에는 시대만 다를 뿐, 맥박은 같다. 둘 다 결과 없는 노동 위에 서 있다.


집을 다 지었을 때 스승은 말했다. “틀렸다.” 간병에서도 종종 그런 날이 온다. 어제보다 나아졌던 걸음이 오늘은 다시 무너진다. 밤새 버틴 혈당이 새벽에 또 흔들린다. 그때 마음은 묻는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그러나 밀라레파의 훈련은 이 질문을 조용히 거둬 간다. 잘못이 아니라 집착이 문제였다고.


간병도 집을 짓는 일이다. 그리고 매일 허무는 일이다. 어제의 성취를 오늘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 법, 오늘의 실패를 내일의 예언으로 삼지 않는 법—그 법을 몸으로 배우는 시간이다. 밀라레파는 깨달았다 한다. 집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내가 옳다’는 기둥이 먼저 무너졌다고.


간병도 그렇다. 내 방식, 내 속도, 내 기대—그 기둥들이 하나씩 내려앉을 때 돌봄은 비로소 가벼워진다. 이 수행에는 좌선이 없다. 대신 들숨과 날숨 사이에 작은 확인들이 있다. 손이 따뜻한지,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지, 지금 이 순간에 남아 있는지.


나는 오늘도 다시 짓는다. 침대를 정리하고, 물을 데우고, 아내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또 허문다. 오늘은 여기까지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밀라레파의 집짓기 훈련은 끝내 집을 남기지 않았다. 간병 수행도 그렇다. 남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태도다. 결과가 아니라 동행이다.


돌을 나르던 그 손처럼, 침대를 밀어 올리는 이 손도 안다.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다. 오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그 힘이 이미 수행이라는 것을.


오늘은 쉐가르까지 가야 한다. 에베레스트의 입구. 길은 아직 멀다. 우리는 다시 깡파의 지프로 올라탔다. 그런데— 덜컹이던 지프가 갑자기 멈춰 섰다. 엔진이 낮게 신음하며 꺼진다. 이번에는, 꽤 심각해 보인다.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