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화이트 다방에서...
5월 2일 날은 서울에 잠시 다녀왔다. 아내가 약을 적게 가져온 바람에 부득이 약을 가지로 갈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내도 나도 건망증이 늘어만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저녁 늦게 서울에 도착을 했는데 밴드에 병용 아우가 내일 아침에 온다는 댓글을 달았다. 이런, 길이 엇갈리네. 아우에게 먼저 도착하면 집에 들어가 쉬라고 했다.
남양주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금가락지에 오니 병용아우가 박성화 박사와 함께 먼저 와 있었다. 병용아우는 새벽부터 매장에 나와 늘 바쁘게 생활을 한다.
어려서 조실부모를 한 아우를 볼 때마다 나는 강한 애정을 느끼곤 한다. 서울에 혈혈단신으로 올라와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하며 자수성가를 한 아우는 마음이 아주 착하고 바르다. 그리고 언제나 솔직하고 담백하다. 그런 아우를 볼 때마다 나는 매우 대견하다는 생각을 한다.
아우는 어쩌면 나와 자라나온 환경이 비슷한 점이 있다. 나 역시 내가 태어난 지 여섯 달 만에 돌아가셨다. 그래도 나에게는 어머님이 계셨다. 나의 어머님은 무척 엄하셨다. 일을 하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으실 정도 게으른 자를 싫어 하셨다. 어머님의 좌우명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않는다”이었는데, 실제로 이 좌우명을 실천하시며 살아가셨다. 어머님을 본 받아 우리 형제간들은 모두가 부지런하다.
조금만 잘못해도 어머님은 여지없이 회초리를 들고 내 종아리가 터지도록 매질을 하셨다. 그런 어머님이 계시기에 나는 삐틀어지지 않고 꿋꿋하게 자라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님의 회초리가 고맙게만 느껴진다.
친 동생이 없는 나는 병용 아우를 볼 때마다 마치 친 동생 같다는 느낌이 든다. 아내도 말한다. “내 일생에 하은이 아빠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에요.”하고.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부부가 아우 같은 사람을 만난 것은 큰 축복이자 행복이다.
우리는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잠시 정담을 나누었다. 우리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집에서 미처 점심준비도 하지 못해, 진상면에 있는 할머니순두부 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금가락지 주변에는 식당이 없다. 군남면 진상리는 이곳에서 10km정도 떨어져 있다.
할매집에 들어가니 식당 안은 만원이다. 딱히 밥을 먹을 곳이 없어 주변에서 농사일을 하거나 공사를 하는 인부들이 거의 다 이곳으로 몰려든다. 메뉴는 순두부, 순두부김치전골, 돼지고기찌개 정도인데 반찬이 시골 집밥 수준으로 나온다. 가격은 5000~7000원대로 저렴하여 가성비 대비 먹을 만하다.
할매집에서 순두부김치찌게 점심을 먹고 우리는 왕징면에 소재한 화이트 다방에서 차를 한잔하기로 했다. 화이트 다방은 아주 오래된 옛날식 다방이다. 오래된 난로와 시계, 의자 탁자, 낡아빠진 선풍기와 TV…
현관 문 위에는 부적, 입춘대길만사형통, 조리, 소코뚫이 등이 걸려 있다. 도심여옥(道心如玉, 도를 닦는 마음은 옥과 같다), 요산요수(樂山樂水) 같은 오래된 액자도 걸려있다. 이런 오래된 것들로 구며진 화이트 다방에 앉아 있으면 마치 시간이 1950년대로 정지되어버린 느낌이 든다. 허지만 이런 것들이 오히려 추억의 정감을 불러 일으켜 마음을 따뜻하고 차분하게 해준다.
화이트 다방에서는 옛날식 모닝커피도 판다. 모닝커피란 커피에다가 달걀 노른자위를 넣어주는 커피다. 술꾼들이 전날 밤 술을 마시고 속풀이로 마시기도 했던 커피이기도 하다. 몇 년 전 이근후 박사(‘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의 저자)가 금가락지에 방문을 하였을 때 이 다방을 방문하여 모닝커피를 마시며 오래도록 정담을 나누었던 추억도 있다. 그 땐 50년 전에 이곳 왕징면 왕징초등학교 교사를 했던 오영희 선생님도 함께해서 화이트다바엥 추억이 더욱 새로웠었다.
이근후 박사는 모닝커피 애호가다. 지방에 강의를 하러 가실 때에도 그 지역에 모닝커피를 파는 다방이 없는가 조사를 하고 가실 정도다. 대학에 나닐 때에 다방에 가면 어른들은 모닝커피를 부티 나게 마시는데 박사님은 돈이 없어서 그냥 커피를 마시곤 했다고 한다. 그 때 어른들이 마시는 모닝커피가 그렇게 마시고 싶었다고 실토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간혹 금가락지에 오시면 꼭 화이트 다방에 가서 모닝커피를 마시자고 하신다. 언젠가는 이근후 박사님과 함께 황해냉면 집에서 냉면을 먹고 모닝커피를 마시러 갔더니 그날따라 문이 닫혀 있었다. 그래서 오늘 어떤 경우에 문을 닫는지, 혹은 문을 닫는 요일이 있는지를 마담에게 물었더니, 서울에 손주를 봐주러 갈 때에는 부득이 문을 닫는다고 했다. 하기야 사장 마음이니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전에는 시골 할아버지 몇 분이 앉아 차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다방 안은 아무도 없고 우리 네 사람뿐이다. 이런 오래된 다방에 앉아 모닝커피를 마시면 자연히 대화의 물고가 터져 나온다. 그렇게 바쁘다던 병용 아우도 시골 다방 분위기가 좋았는지 무려 1시간 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후 3시가 다 되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화이트다방' 이란 이름은 지금은 사라져 버리고 없는 화이트교(현재 임진교)의 이름을 딴 매우 오래된 다방이다. 6.25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할 때 임진강에 다리가 없어 당시 미공병대 화이트 소령이 나무다리를 급조해서 만들어 북진을 했던 역사적인 다리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화이트교는 지난 2003년 전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화이트교
외국에서는 없는 역사의 현장도 만들어 보존을 하는데 너무 아쉬운 생각이 든다. 6.25 전쟁이후 53년간이나 임진강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했던 화이트교 이름을 따서 지금도 왕징면에 화이트 다방, 화이트 펜션, 화이트 부동산 등 '화이트'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곳이 많다.
최근(2016.6.1.)에는 왕징면에서 화이트교가 시작되는 곳에 조형물을 하나 새로 설치해 놓고 있다. 머릿돌에는 “한반도 통일의 중심지역 왕징면 분단의 아픈 역사와 한이 서린 임진강에 건설된 화이트교를 모태로 남과 북의 만남을 염원하며 이 조형물을 설치하게 되었다”고 되어 있다.
▲화이트교를 상징하는 조형물
이런 조형물보다는 북진을 하며 건설된 역사 속의 화이트교를 보존했으면 얼마나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볼 수 있겠는가? 홍수가 나면 화이트교에 쓰레기들이 걸려 보기에 흉해서 없앴다고는 하지만 그런 장애를 보수를 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역사의 교육현장으로 남겨둘 수는 없었을까? 화이트 다방을 나오면서 못내 아쉬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