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아름다운 일출이라니

다시, 산티아고 20. 레리에고스에서 레온

by 지상

놀란 가슴으로 하루를 묵었던 레리에고스. 딱히 저녁거리를 사거나 먹을 수 있는 가게도 없었지만 입맛도 없어서 간식으로 남겨두었던 사과 한 알과 빵 두 조각으로 저녁을 때웠다. 아이의 발뒤꿈치에 생긴 물집은 더 심해져 피고름이 섞여 나왔다. 실을 심어 두고 어설프게 다시 밴드를 갈아 붙일 수밖에 별다른 치료방법이 없었다. 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걸음을 빨리한 원인도 있으리라. 상상도 못 한 일과 맞닥뜨린 상황에서 내가 아이를 보호해야 하는데 아이가 나를 보호하고 있으니 이제 서로의 역할이 조금씩 치환되고 있는 것 같다. 아직은 썩 내키지 않으나 내가 담당했던 것은 아이에게, 아이가 담당했던 했던 것은 내가 맡아가는 것, 살아가는 이치이고 방법일 것이다.

도착이 늦어진 어제 햇볕 한 점 남아있지 않은 마당에 널어 두었던 빨래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아직 덜 마른 옷가지들을 침대 난간 이곳저곳에 펴놓고 일찍 잠을 청했다. 몸은 덜 마른빨래처럼 무거웠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로스아르고스 바로 옆 침대에서 요란하게 코를 골았던 그 여인을 어떻게든 만나지 않으려고 애를 썼는데 결국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하루 이틀 출발일이 다르더라도 걷다 보면 한 번 만난 사람들을 다음이나 그다음 숙소에서 만나게 된다. 그 여인이 그랬다. 내가 부르고스에서 이틀 머물렀으니 하루 뒷 서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30, 40킬로미터를 걸어 보통 삼일 치의 거리를 이틀에 이동한 때문에 만나버리고 만 것이다. 반가운 듯 인사는 했으나 분명 내 얼굴에 오늘 저녁은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내 보이고 말았을 것이다. 같은 방이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옆방에서까지 들려왔다. 그래도 어쩌랴 당신은 얼마나 힘들겠나 싶은 마음에 절반쯤은 소리가 작아지는 것 같았다.



이래저래 불편하고 불안하게 하룻밤을 보낸 레리에고스 숙소에서 아직 어두움이 가시기 전에 출발했다. 아침도 굶은 채로.

이제 제법 찬기운이 느껴져서 햇볕 차단용 장갑을 끼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야 했다. 여름용 바지는 싸늘한 기운을 여과 없이 흡수한 채 추위를 배가 시키지만 상쾌했다. 스페인의 가을은 겨울과 여름을 버무려 놓은 듯하다. 잘 섞이지 않은 여름은 오후 두, 세 시경에, 겨울은 아침, 저녁 참에 머물러 있고.

저리 아름다운 것은 한 번 더 돌아보게 하려는 것


그래도 손 시린 그 아침참이 좋은 이유는 떠난 마을 쪽에서 떠오르는 일출 때문이다. 마을을 한 번 더 돌아보게 하려는지 등 뒤에서 해가 뜬다. 오늘도 그랬다. 어둑한 길을 바삐 움직이다 붉은 기척에 돌아다본 하늘이 장관이었다. 전날의 불미스러운 일을 보상이라도 해 주시려는 것인지, 어찌 저런 하늘을, 저런 풍경을 보여 주시나 싶어 갈길을 잊고 한참을 다리 위에 서서 감동했다. 다시 걷다가도 몇 번이나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아침이었다.


두 시간 가량을 걸은 후 첫 번째 마을 만실라에 도착했다. 후안 아저씨가 묵은 마을이어서 혹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었으나 순례자가 그 시간까지 출발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남은 길 위에 섰다.

레온으로 가는 마지막 마을에 이르렀을 때 두 갈래 길이 나왔다. 노란 화살표의 길과 요즘 구미노란 은어로 알려진 구글맵의 카미노. 구글 카미노는 가급적 지름길로 안내한다고 알고 있어 노란 화살표를 못 본 척 구글 카미노를 선택했다. 마지막으로 넘으면 될 것 같은 언덕도 바로 앞이었고. 그런데 웬걸 언덕을 넘어서니 노란 화살표 길로 안내한다. 오히려 더 돌아가는 꼴이 되어 버렸다. 꾀는 아무데서나 통하는 것이 아니다. 부릴 자리 안 부릴 자리를 잘 봐야 한다.

구미노

레온은 부르고스와 함께 카미노에서 큰 도시에 속한다. 도시로 향하는 것은 언제나 들뜨게 한다. 마치 시골 처자가 모처럼 도시 나들이 가는 것처럼. 더구나 오늘 숙소는 여자만 자는 도미토리로 깨끗하다는 평을 보고 미리 예약을 해 놓았다. 평소보다 배가 더 비싸게.

요 며칠에 비해 짧았다고는 하나 긴장과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던지 큰 도시로의 설렘도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저녁 6시경 쯤 되어서야 숙소를 나와 산타마리아 대성당을 둘러보고 대성당 안에 있는 경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다른 날과 똑같이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노사제의 강론 말씀이 유난히 길게 느껴진 날이었다.

저녁 참의 싸늘함은 아침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아침의 싸늘함은 상쾌함을 동반하지만 저녁의 싸늘함은 추위를 동반한다. 빛이 퍼지는 싸늘함과 빛을 거두는 싸늘함, 그 차이랄까. 걷히는 빛이 대성당 첨탑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다. 새삼스레 모든 것에 감사의 마음이 솟았다. 여기에 서 있는 것, 내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 나의 빈자리를 지켜주는 한국의 그들, 내가 오늘에 있게끔 해 준 모든 분들... 힘겨운 시간들을 잘 건너게 해 주신 것, 모든 것이 편안한 것...

센치멘탈한 광장의 시간을 노을 따라 보내고 근처 마트로 갔다. 오랜만에 만난 대형(?) 마트라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지만 긴장을 해야 한다. 하나로 마트에서 장을 봐서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다음날 다시 배낭을 짊어져야 하니 오늘치 저녁만, 내일 아침, 그리고 내일 걸으면 먹을 약간의 간식만 사야 한다. 이 모든 걸 합쳐 10유로 이내. 작은 일인 듯 하지만 배고플 때 만나는 마트는 스스로 컨트롤을 해야 하는 것 중 가장 힘든 것이다. 그래도 어찌하지 못하고 와인 한 병을 사고 말았다.


('22년 10월 15일, 토, 걷기 19일째, 24킬로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