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까지 침대에서 뭉그적거렸다. 늘 6시 전에 일어나다 모처럼 침대에 악어가죽처럼 붙어 있다 악어처럼 느릿느릿 일어나 채비를 했다. 오늘은 레온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한 날. 마음에 자동으로 장착된 '빨리빨리'를 내려놓고 이곳저곳 기웃거려보고 햇볕에 앉아 졸기도 할 것이다.
어젯밤 비가 지나갔다보다. 꽤 싸늘했다. 숙소 근처 카페에서 크로와상과 커피를 시켜놓고 여유로움을 엿가락처럼 길게 늘인다. 삶 순간순간 이런 여유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패키지 출장일 때는 더욱. 이런 내 마음이 닿았는지 한 무더기 한국인 여행객들이 가이드를 따라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절로 피로감이 느껴졌다. 시간에 맞춰 움직여야 하는 것이 촉박하게 삶이 떠밀리는 것 같아 어느 순간부터 패키지 여행을 멈추게 되었다.
레온을 걷다가
산타 마리아 대성당
카미노를 걸을 때보다 열 배쯤 느린 걸음으로 시내를 걷는다. 가우디 건물, 마요르 광장, 다시 대성당, 작은 성당들, 수도원이었던 레알 콜레히아타 산 이시도르 호텔, 복원 중인 성벽, 광장, 잡화점 등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음에 두었던 레온 대학으로 갔다. 일요일이라 내부는 들어가 볼 수 없었으나 교정을 걸었다. 대학 건물인지 일반 건물인지 구분도 어려웠으나 따로 경계가 없는 대학 교정을 걷는 것만으로도 지식이 마음에 꽉 찬 듯 풍요로워졌다. 나는 어느 도시든 조금 큰 도시에 가면 대학에 갔다. 오래전 스톡홀름에 갔을 때 10일간의 일정에도 한 시간 반이나 떨어져 있는 웁살라 대학과 스톡홀름 대학에 갔던 적이 있었다. 치앙마이에서도 치앙마이 대학을 갔다. 이런 습관 같은 욕구는 아마도 내 핸디캡에서 오는 게 아닐까 싶어 가끔은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맨 위 언니는 줄줄이 달린 동생들로 인해 공부를 하지 못했다. 언니와 나 사이에는 오빠 둘이 있고 내 아래로 남동생이 있다. 가부장적 문화와 사고가 가득한 농촌에서 딸보다는 아들 위주로 교육을 시켰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해하지 못한 적도 있었으나 부모님 삶을 알게 된 후 나는 그분들의 신념 같은 선택을 ‘어쩔 수 없었음’으로 완전히 이해했다. 태어난 순서의 차별이 됐든 성차별이 됐든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제때 할 수 없었고 남들보다 몇 년이 지나서야 방송대를 마치고 결혼 후 대학원까지 마치고 보니 쉰이 되어 있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할 수 있는 특수 대학, 대학원을 졸업해서인지 시도 때도 없이 도지는 공부에 대한 목마름은 병처럼 나를 쫓아다녔다. 수능 시기가 되면 나라가 떠들썩한 것도 상처를 건드리는 것처럼 쓰라렸다. 요즘은 덜하겠지만 혹 돈 때문에 공부를 더 할 수 없는 아이들의 마음이 아로새겨져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해결 안 된 트라우마 같은 스무 살 적 학습욕구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닦달한 것도 그 까닭이었다.
모든 일은 지나가기 마련, 이젠 공부에 대한 미련을 남겨주신 것도 감사하고 제때 할 수 없었으나 할 수 있게 해 주신 것도 감사하다. 늦은 나이까지 배우고 익혔으므로. 이국땅 어디서든 대학을 보고 싶어 하는 것도 좋은 습관인 듯해서.
아이의 손을 잡고 교정을 되돌아 나온다. 늘 배우려는 마음을 놓지 말아라, 나중에 배움에 대한 후회를 남기지 말아라. 하고자 하는 것에 생에 한 번쯤은 몰두하는 것이 얼마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지 아이들이 그 맛을 알았으면 좋겠다.
구시가지를 빠져나와 신시가지로 걸었다. 거기엔 며칠 전부터 기대하고 있던 중국음식 뷔페 WOK이 있었다.
삼십 분을 걸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 길거리가 환하다. 즐비한 길거리 서점이었다. 중고책, 새책들을 팔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책들을 고르고 있었다. 유적지를 만난듯 그 앞을 서성거렸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역사적인 유물들도 많았지만 길거리 서점도 레온을 떠올릴 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