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있네

다시, 산티아고 22. 레온에서 산 마르틴

by 지상

비 오는 레온을 떠난다. 더 머물고 싶은 마음과 어서 저 드넓은 들판을 걷고 싶은 마음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한다. 일부러 관광도 오는데 2박 3일이라고는 하나 늦게 도착하고 새벽녘에 출발하다 보니 온전히 머무는 시간은 하루뿐이었다. 하루 만에 게을러져 버린 발걸음... 불편함에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편함에는 쉬이 익숙해진다는 것을 느낀다. 다시 익숙해진 게으름만큼 침묵도, 끝 모를 길도, 허허벌판의 바람도 그리워진다.


레온과 인접한 변두리 마을들을 지나고 지금껏 보지 못한 공장지대를 지난다. 아직 어둠에 잠겨 있으나 공장들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다. 두 시간을 걸어도 여전히 도시와 마을과 공장이다.

비가 잠시 멈추면 아우터, 비옷 두 겹의 모자를 벗고 아침 바람을 쐰다. 도시여서 인지, 비의 훈기 때문인지 그다지 춥진 않다. 아마도 이 비가 그치면 추위가 10킬로미터쯤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비 오는 레온을 떠나



잠시 들른 카페에서 캐나다에서 왔다는 한국인 부부를 또 만났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은 숙소에서, 시내를 거닐다, 때로는 식당에서 마주친 부부였다.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는 부부들은 딸과 함께 온 나를 부러워하고 나는 부부끼리 온 그들이 조금 부러웠다. 한편, 여행 중이라고는 하나스물네 시간 붙어 있는 그들이 신기하기도 했다. 어떤 처자는 피레네를 넘다 남편과 같이 왔다면 남편을 버렸을 거라고도 하지 않던가. 그만큼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길이었다.


가끔 생각하곤 했다. 30년 이상 살아낸 부부들은 컴퓨터를 열고 가정법원에 들어가 클릭 하나로 온라인 이혼이 가능하면 어떨까. 가령 결혼해지라고나 할까. 20년 이상 산 부부들은 서류 한 장만 제출하고 법원에 갈 필요 없이 서면 이혼이 가능하면 어떨까. 10년마다 결혼 갱신 같은 것, 또는 이혼 자격 같은 것을 주면 어떨까. 물론 서로가 원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국적 박탈될 생각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이혼율이 더 낮아지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 양육과 재산분할 같은 것은 그 문화에 맞게 정리가 될 것이다. 오히려 그런 문화가 일반화되면 아이들도 낙인 되지 않고 더 건전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언젠가 친구에게 이런 얘기를 했을 때 그 친구는 나를 흘겨보며 일갈했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도로를 따라, 들판 사이를 따라 별 어려움 없이 산 마르띤까지 총 7시간이 걸렸다. 차량들이 지나며 클락숀을 울리고 손을 흔들어 응원해 준다. 순례자가 길을 건너려 서있으면 차를 멈추고, 마을을 지나면 사람들마다 부엔 까미노로 축복해준다. 길을 잘못 들면 카미노로 안내해 주고, 밭을 갈다가도 순례자가 지나가면 먼지 날리는 농기계를 멈춘다. 레스토랑들은 순례자 메뉴를 저렴하고 푸짐하게 개발해 나눈다. 가끔 몹쓸 일도 있고, 있을 수 있으나 어찌 이 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어찌 이 길을 걷고 싶지 않으랴, 어찌 이 길이 그립지 않으랴.

이제 남은 길은 290킬로미터 남짓. 800킬로미터를 어떻게 걷나 싶을 정도로 불가능해 보였던 길이 한 걸음, 한 걸음에 끝나가고 있다. 지금부터 아쉬운 것은 사삭인가. 그렇더라도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덜 들게 더 꼭꼭, 세심하게 이 길을 즐기며 걸어야겠다.

294킬로미터 남다


마을을 한 바퀴 돈다. 널찍널찍한 정원을 가진 아담한 주택들이 자리한 마을, 반면에 빈 집들도 한 두 채 서있다. 사이사이 빈 땅들... 지나온 길에 있던 여느 시골과 다를 게 없는 마을이다. 느린 걸음으로 한 바퀴 돌아도 30분도 안 걸린다. 숙소에 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소나기가 쏟아진다. 서쪽 하늘은 구름이 비끼고 더욱 푸른 하늘이 돋는데 여우비다. 스페인 호랑이도 장가를 가나 보다.

한 숙소에 든 캐나다 한국인 부부와 저녁을 같이 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아내가 나와 동향이었다. 지금까지와 다른 반가움으로 동시에 두 손을 꼭 잡았다.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지연’이라는 세포가 최대로 활성화되는 순간이었다. 아직도 고향에 동생이 살고 있다고. 늘 그립기도 하고 친청 어머니가 살아계셔서 자주 한국에 들어간단다.

매일 매 순간 같이 보내는 시간이 괜찮냐는 내 질문에 그렇지 않아도 한 번 싸웠다고 부부가 마주 보며 웃는다.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중년의 곰삭은 웃음이 환하다. 왜 남편은 안 왔느냐는 질문에 나와 딸이 동시에 한 말 ‘열심히 돈 벌고 있어요’ 남편들은 불쌍하다고 동향 댁 남편이 한 마디 한다. 맞다고 나도 대답하며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 고맙고 미안해진다.

그래서 가야 할 길



오래 산 부부들의 결혼 유지와 이혼의 방법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공통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우리가 같이 산 삼십 년이 기적이었다고, 이제와 그 기적을 뒤집을 수도, ‘클릭’ 할 수도 없다고 창 밖 허공에 읊조린다. 산 마르띤의 빈 땅, 잡초들이 우거진 대지에 국지성 소낙비가 내리고 그 사이 천둥번개가 어둠을 가른다.

('22년 10월 17일, 월, 걷기 20일째, 24킬로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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