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에서 찍은 사진 중에 시간 정보가 제대로 입력되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샌프란에서 찍은 사진에 서울 기준 시간 정보가 붙어 있어서 한국에 돌아와서는 깜짝 놀라며 카메라의 시간대를 고쳐놓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 사진은 시간 정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회사의 행사가 중간쯤에 접어든 화요일 늦은 오후(그와 6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5시 50분쯤에 이곳을 지나갔을 것이다) 메니져와 함께 이동하기 위해 그가 묵고 있는 호텔로 가면서 쏟아지는 강렬한 석양빛을 쫒아 조리개를 좁히고(아마도 f9) 스폿(spot) 측광 모드에서 멀찍이 걷고 있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담았다.
지구별 방랑자 1호가 2호를 찍은 거다. 외롭게 어디론가 터덜터덜 걷고 있는 그의 머리 위로 햇살이 밝게 투과되어 나온다. 그의 어깨와 바지에 실루엣이 밝은 빛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그는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어디에서 왔을까?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아 표정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빛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과 길게 늘어진 그림자만이 말없이 그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다. 조금 천천히 느끼면서 살아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