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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깨 Oct 14. 2024

오래 걸린 답장

수빈에게


5/2/2024


5월 첫째 주 목요일 아침이고, 나는 지금 시애틀 북쪽의 어느 공원 앞 카페에 앉아 있어. 작가들의 글쓰기 모임에 와있거든.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짧게 자신의 작업과 근황을 나누고 한 시간 남짓 각자 자기 작업을 이어가. 아마추어인지 프로인지 묻지 않아서 좋아.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작가들의 조용한 커뮤니티라는 게 마음에 들고. 오늘이 두 번째 참가이고, 지난주에는 긴장된 마음에 아무것도 못 하고 들고 온 책만 조용히 읽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여유가 생겨 랩탑을 열었어. 사람들에게는 아직 아무것도 쓰고 있는 것이 없고 다시 쓰기 위해 근육을 키우고 있다,라고 말해놨거든. 어디에서부터 근육을 키워야 할까. 글을 쓰기 위한 근육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물렁해져 버린 코어를 단단히 붙잡고 앉아서 머릿속을 뒤적여봤어. 

벌써 5개월이 다 되어가는 완전히 새로운 미국 생활을 거꾸로 되짚어보다 보다가 5개월 전의 공항에서의 눈물겨운 이별을 떠올렸고, 그 전의 30년이 훌쩍 넘게 살아온 공간이 쥐고 있는 랜덤한 내 기억들이 떠올랐어. 역순으로 되짚어보던 기억 속 중간중간 점점 어려지는 너도 보고 나도 보고. 그리고 그 모든 순간 속의 너는 정말 한결같다는 점이 놀랍고 또 안심이 되더라. 그래서 나는 먼저 내 삶에서 가장 믿음직한 너를 붙잡고 무너져버린 근육을 다시 만들어보려 해.  


네가 쓴 편지를 오랜만에 다시 한번 읽어봤어. 단번에 답장할 수 없다는 것을, 신속하고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답장을 너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바심 내지 않고 있었거든. 그저 가끔 그 내용을 떠올리고, 언젠가는 무엇이라도 쓸 수 있기를 바라고, 너의 마음을 떠올리고, 그러면서 시간이 흘러가도록 놔두었어. 그동안 내 안에서 무언가가 만들어지길, 새로운 마음이 찾아오길 기다렸던 것 같아. 뭐가 얼마나 만들어졌는지, 무언가가 찾아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단, 이곳의 쓸쓸하고도 축축한 긴 겨울이 이제 드디어 끝난 것 같고, 그리움이 무르익은 것 같았고, 어쩌면 함께 둘러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는 사람들의 에너지에 힘입었는지도 모르지. 큰 테이블에 놓인 랩탑을 타이핑하는 소리, 무언가를 쓰고 있다는 것을 대단치 않게 무심히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게 내가 다시 시작하는 부드러운 압력이 돼.  


‘‘문명화’의 의지에 가까운 기독교인의 오만한 태도’는 십 수년 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기독교의 선교에 대한 느낌을 잘 설명하는 말이야.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기억하는 한 그 느낌의 시작은 우리가 함께 알고 있는 어느 한 인물에서 출발해. 그는 우리 학과의 과대표 학생이었고, 학과 동기들 대부분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했었어. 과대표로서 자신의 목표는 졸업할 때 동기들을 모두 개종시키는 거라고. 그 말을 듣고 뜨겁게 울컥 올라왔던 복잡한 감정을 아직도 기억해. 개인적으로 만나면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개종시키겠다’던 그의 발언은 모든 이들의 마음을 정복하겠다는, 다분히 폭력적인 의도가 개입된 결과라고 생각해. 그 이후로 내게 기독교를 알리려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때의 마음이 떠올랐어. 아, 그런데 그 충격은 내게 어떤 긍정적인 기여를 하기도 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어디에서 왔든, 무엇을 갖고 무엇을 가지지 않았든, 나는 어떤 우월감도 가질 수 없고 어떤 열등감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감각이었어. 그 감각에서 비롯된 태도는 아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나라에 온 지금 아주 도움이 돼. 쉽게 판단하지 않고, 쉽게 조언하지 않고, 또 쉽게 주눅 들지 않도록.


하지만 동시에 나는 내게 예수와 신을 알리고 싶어 하는 너의 간절한 마음이 그런 정복욕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아. 오히려 미안함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어. 네가 아는 아주 좋은 것을 내게 공유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미안함, 그것을 내게 나눠주지 못하는 너의 ‘부족함’을 안타까워하는 마음. 일단 이것부터 짚고 넘어가고 싶었어. 너의 도전과 시도가 나를 불편하게 하거나 귀찮게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어떤 결론이 나오더라도 나는 이 여정을 너와 함께 기꺼이 나눌 것이라는 점을 말이야. 

한 시간이 지났어.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유롭게 풀려나고 있어. 짧은 시간 동안 대단한 걸 해낼 수는 없었겠지만 무언가를 매듭지었거나 매듭지어야 할 것을 새로 발견한 사람들. 나도 너를 붙잡고 무언가를 해냈어. 무려 몇 개월 만에, 글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썼어. 이제 내가 무엇을 했는지 사람들과 짧게 말로 나눌 시간이야.  


5/17/2024


내가 나에 대해 무엇이라도 끄적이기 시작한다면 그건 나를 걱정해도 좋다는 신호라고 누군가에게 말했던 기억이 나. 너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힘듦을 이겨내는 유일한 동력이 글쓰기일 때가 있었다고. 평온할 때에는 쓸 것도, 쓸 이유도 없었다고 말이야. 물론 그런 시기는 이미 지나갔고 나는 내가 곧 지속 가능한 글쓰기, 건강한 마음으로 오래 쓸 수 있는 몸과 마음과 그리고 그 순간이 찾아오길 바라. 많은 것이 준비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내가 할 일은 조용히 앉아 스스로 만들어지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받아 적기만 하면 된다는 그 순간이 오기를 말이야.

나는 세상에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고, 심지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도 상호호혜적인 요소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나는 그걸 요새 훈기를 보며 더 많이 느낀다. 어떨 때는 내가 훈기를 사랑하는 것보다 훈기가 나를 더 많이 사랑하는 게 아닐까 싶은 때가 있어. 뿌듯하고 미안한 순간이지.) 내가 타인에게 기여한 만큼만 나한테 돌아온다고, 기여하지 않았을 때는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어. 그런데 살다 보면 이런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만남들이 있는 거야. 나는 그저 조용히 내 삶 하나를 위해 살고 있었을 뿐인데 말이야. 그런데 어디에선가 내게 가장 도움이 될 만한 방식으로 내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나타나. 알려주겠다는 사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소개해주겠다는 사람, 동료가 되어주겠다는 사람, 그저 지지해 주겠다는 사람. 

한국에서도 그랬고, 미국으로 온 지금도 그래. 내 세계 안에 존재하지 않던 사람이 새롭게 등장할 때도, 내 세계 안에 존재했지만 한 번도 포커스를 맞춰본 적 없던 사람이 가까이 다가올 때도 있어. 그럴 때는 내가 기여한 것 이상의 것을 받고 있다는 빚진 느낌이 있어. 이래도 되는 걸까, 감사한 마음이, 이래도 되는 걸까, 설레는 마음이, 그리고 여전히 이래도 되는 걸까, 두려운 마음이 동시에 든다. 

나는 너도 이 느낌을 분명히, 아주 정확히 알 거라고 생각해. 타인에게서 오는 감사, 설렘, 두려움을 한꺼번에 겪을 때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너와 나 사이의 공통의 느낌의 기원과 목적지가 다르다는 것도 알아. 나는 내가 겪은 이 신비한 경험들 안에서 신을 발견할 수 없어. 감사와 설렘과 두려움을 두 손안에 포갠 채 기도를 하고 있는 너와는 다르게 말이야. 여전히 이해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고, 설명하기 어려운 삶이지만 그 불가지 한 것이, 불확실한 것이, 불명확한 것이 내게는 신으로부터 오지 않아. 대신 나는 그 미지의 감각을 여러 번 곱씹어 봐.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언젠가 내가 누군가의 세계에 불쑥 들어가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지난번에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얼굴 볼 수 있었던 게 내게는 정말 큰 힘이 되었어. 이러다가 다시 폭삭 주저앉아 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들 때면 나는 네가 10시간의 거리를 건너뛰어 실시간으로 보여준 흘러넘치는 격려를, 살짝 비친 눈물을 생각해. 십 수년 전에 어디에선가 갑자기 튀어나와 내게 와준 너를, 가장 필요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다가와준 너를 생각하면 나는 멍하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그게 멀리 있는 네가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이야.  


6/1/2024


혼자 산책을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네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너는 내 모든 단어 하나하나를 아주 무겁게 들어주어서, 나는 너에게 아무 말이나 할 수가 없었던 것 같아. 그건 그저 진지한 태도도 아니고, 그저 탐구심도 아니고, 아무래도 너는 내 입을 통해 나오는 ‘나’라는 존재를 무겁게 받아들인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아마 십 수년 전부터 나는 너에게 가볍게 흘릴 수 있는 말들보다는 이 진중한 청자에게 걸맞은 말을 하게 된 게 아닌가 싶어. 너에게 들려주는 내 과거는 이미 성찰을 거친 것이어야 했고, 너에게 말하는 내 현재는 진행 중인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였고, 너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내 미래는 거의 ‘선언’에 가까웠던 것 같고.

문득, 네가 절대자를 섬기는 사람인 게 나에게 이런 식으로 영향을 주는구나 싶어. 줄곧 너는 듣는 사람, 나는 말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거든. 그 절대자를 삶의 기준으로 삼는 너에게 내 과거부터 미래까지를 말로써 전부 드러낸다는 건 곧 간접적으로 그 절대자 앞에서 나도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10/13/2024 


사흘 전 내 생일 아침에 눈을 떠서 가장 먼저 확인한 건 네가 보내 준 생일 축하 카드였고, 두 번째로 확인한 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었어. 두 소식 모두 내가 한국에서 정말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실감하게 한 메시지들이었던 것 같네.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이겨내고 나오는 내 대답의 대부분은 한강 작가였을 거야.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노벨상을 타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세계에 그렇게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감동을 잠깐 미뤄두고 나니 찾아오는 건 염려하는 마음이었어. 아끼는 사람이 세간의 중심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희소식 때문일지라도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걸 알게 된 것 같아. 괜히 시샘하는 사람들의 못난 말들을 듣게 되지 않을지, 묵묵히 쓰고 있을 뿐인 작가의 시간을 빼앗는 게 아닐지,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될 다른 작가나 작품들과 비교당하는 게 아닐지. 물론 이런 걱정들은 단단한 마음을 가진 작가 본인의 사정과는 상관없는, 멀리서 응원하는 사람의 약한 마음을 반영하는 걸 테지만 말이야. 

그래도 그게 누군가를 아끼는 사람의 본심이라는 걸 새삼 알게 된 것 같아. 그 사람의 눈부신 성공 앞에서도 혹시 모를 어려움에 미리 마음 아파하는 것. 그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아낄 수 있다는 것.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평온하기를 바라는 것.

나는 너에게도 같은 마음인 것 같다. 네가 지금까지 겪어 온 크고 작은 성공들과 앞으로 이루게 될 많은 것들은 어쩌면 내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고, 나는 네가 그 사이사이의 일상들에서 평온하기를 바란다. 

멀리에서 그 마음을 보낸다. 무사히, 평온하기를.   


-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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