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선택, 단단한 하루

같이 산다는 건, 서로에게 등대가 되어주는 일

by 맑은눈빛연어

남편과 나는 조금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지금이야 마흔을 넘긴 싱글도 흔하지만, 20년 전 서른다섯과 서른아홉은 ‘막차 커플’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걸 실감한 건, 남편 직장에 청첩장을 돌렸을 때였다. 이미 예정돼 있던 직원 체육대회 날짜와 겹쳤는데, 남편의 근무하던 곳의 최고 수장인 ◯◯장님이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마지막 주자군.”


그 말과 함께 그는 행정실에 연락해 체육대회 일정을 변경했고, 결혼식에도 참석해주셨다. 우리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듯해, 지금도 그 장면이 마음에 오래 남아 있다.


신혼은 20평형 아파트 전세로 시작했다. 나는 전략실에서 기획 업무를 맡았고, 남편은 전문직으로 일했다. 두 사람 모두 바쁜 나날이었지만, 그만큼 서로에 대한 기대도 컸다.


결혼한 지 1년쯤 지났을 무렵, 나는 B형간염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했다. 급격히 높아진 간수치를 낮추기 위해 매주 병원에 들러 주사를 맞고, 매일 약을 복용해야 했다.


그 무렵 남편은 야근이 잦고 주말에도 근무가 이어질 만큼 바쁜 시기였지만, 매주 병원에 동행해 주었다.

연애할 때만 해도 에너지가 넘치고 잘 웃는 사람으로 보였던 내가, 병원에 다니며 점점 지쳐가는 모습을 보이자 남편은 알게 되었다고 했다.


‘아, 이 사람이 겉보기보다 스트레스에 더 취약한 사람이구나.’


나 역시, 늘 기록과 싸우는 공직자로 빡빡한 일정을 살아가는 그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병원에 함께해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고마웠다.


다행히 1년간의 치료 끝에 수치는 안정되었다. 나는 건강 문제로 회사를 그만두고 치료에 전념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헤드헌터의 제안으로 새 직장에 출근하게 되었다.


주요 업무는 중장기 전략 수립. 집에서 거리는 멀고 야근이 잦았다.
업무가 본격화되며 퇴근 시간은 점점 늦어졌고, 어느 날은 자정을 넘겨 귀가하는 날도 생겼다.

그 시기, 나의 잦은 야근은 나에게도, 늦은 밤이면 어김없이 마중 나오는 남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혼 3년 차가 되어가도록 간절히 바라던 아이가 생기지 않은 것도 우리 부부에겐 깊은 고민이었다.


그즈음 남편의 직장에서는 10년에 한 번, 한 달간의 해외연수를 보내주는 제도가 있었다.
연수를 앞둔 남편은, 그 시간을 통해 각자의 일과 아이 문제에 대해 함께 충분히 고민해보자고 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리고 문득, 쉼 없이 달려온 내 커리어를 돌아보게 되었다.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우리를 닮은 아이를 더 늦기 전에 품고 싶었다.

그때부터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온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해주시고, 저희 가정에 새 생명을 허락해주세요."


기도를 거듭할수록 일에 대한 욕심은 조금씩 사그라졌다.


야근으로 지쳐 귀가한 밤, 그럼에도 환한 얼굴로 나를 반기던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고,
늦은 밤 간식을 함께 먹으며 조용히 나누던 대화들이 따뜻하게 되살아났다.

그러나 아이를 갖기 위한 여정은 쉽지 않았다.


산부인과에서는 간염 치료 당시 투여한 주사약이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고, 노산으로 인한 여러 주의사항도 많았다.


'커리어와 아이'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어느 날, 결심을 내렸다.

부장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휴직’이 아닌 ‘퇴직’을 선택했다.
돌아보면, 그 선택은 내 인생의 가치를 다시 정의해준 순간이었다.


퇴직하는 날, 가장 친한 친구가 함께 해주었다.
14년간 이어온 커리어의 마침표를 찍은 나는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친구와 파스타를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그때 친구가 말했다.

“너 왠지 임신한 것 같은데, 병원 한번 가봐.”


그날 오후, 나는 아들 윤이의 첫 초음파 모습을 만났다.
남편에게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하자, 그는 눈물이 날 만큼 기뻐했다.
하지만 이내 물었다.


“우리가 곧 해외연수를 가야 하는데, 비행기를 타도 괜찮을까?”


병원에서는 임신 초기인 12주까지는 장거리 비행을 삼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나는 못 가지만, 자긴 꼭 다녀와. 좋은 경험이 될 거야.”


하지만 남편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아냐. 내가 혼자 어떻게 가. 나는 아이랑 함께 있을래.”

그 순간, 이 사람이 가족을 삶의 중심에 두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남편은 그 중심을 놓치지 않는다.
사춘기 아들과 씨름하느라 지치는 날이면, 말없이 설거지를 마치고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이 나를 위로해준다.


19년 전, 나는 말했다.

“아이를 갖게 된다면 내가 직접 키우고 싶어. 일도 잠시 쉬고 싶어.”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나눴다. 나는 육아와 가사, 남편은 경제적 책임.
한 사람의 선택이 아니라, 두 사람의 약속이었다.


물론, 내가 계속 일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면 지금의 아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나는 전업주부가 된 지 10년 만에 ‘글 쓰는 주부’가 되었다.
작년엔 마케팅 프리랜서로 일했고, 올해는 책을 내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

그런 내게 남편은 늘 건강을 먼저 걱정하며, 마음의 안녕을 바란다.

세상의 기준에 흔들리며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싶은 날이면,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잊지 않게 해주는 사람이다.


과묵하고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사람이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성숙한 조언을 건네는 남편.
우리가 큰 다툼 없이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서로를 끝까지 존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이 산다는 건, 서로에게 등대가 되어주는 일.
어둠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도록, 말없이 빛이 되어주는 일.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