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찬집 Feb 26. 2017

속절없는 생각

오래전 미국의 정치사회철학자 마크틸라교수의 <무모한 마음, The Reckiess Mind>가 출간되어 그 당시 국내 매체에서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릴라교수의 주제는 속절없는 열정으로 20세기 한 때를 피로 물들게 한 극에 치우친 좌우파시즘, 나치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양면을 들어내고, 중요한 인물로는 하이데거, 슈미트, 그리고 벤 야민, 코제브, 푸코, 데리다 등을 들어 놓았다.

즉 그들의 공통점은 남은 인정하지 않은 “전제성(專制性)에 대한 열망”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전제성에 대한 열망은 겉으로는 나름대로의 깊숙한 철학을 지닌듯하면서도 이면에는 도선적인 정당성을 함유한 ‘함정’이 내포되어 있어 그들의 속절없는 열정은 결국 그들로 하여금 이상과 달리 엉뚱한 비극의 결말을 이르게 했다는 것으로, 그들의 전제성에 대한 열망은 우리정신에 내재한 다양한 영을 정직하게 그리고 올곧게 들여다보는 데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더구나20세기 한때의 철학 계를 풍미하던 대 철학자 하이데거와 슈미트와 함께 분별없는 열정으로 히틀러의 나치를 옹호하였을 뿐 아니라 나치당원으로서 유태인 학살에 일조하여 역사상, 철학 상 씻을 수 없는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흔히 학문과 정치가 밀착된 정학유착(政學癒着)을 비꼬아 이야기되는 ‘철학자가 왕이 되려고 하면 철학과 정치가 함께 망가진다.’는  말대로 특히 하이데거는 그의 정치적 실천으로 2차 대전 후 계속 문제가 되어 왔고, 지금도 되고 있는데서 결국 학자는 이론의 실현의 전제가 되면서도 학자가 몸소 이론의 실천자가 되면 백발백중 실패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한다.

훨씬 기원전으로 소급하여 중국 전국시대 혼란기에 맹자(孟子)주유천하(周遊天下)하면서 그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천하려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왕도정치는 오랫동안 동양의 봉건정치에 규범의 되었고, 그리스의 플라톤은 그의 철학정치를 실천하려 시칠리아의 통치자 디오니소스 2세를 찾았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도 그이 철학정치는 서양고전정치의 하나가 된 것은 맹자건 플라톤이건 몸소, 왕도, 철학정치의 실천자가 되었다면, 아마 그들도 그들의 왕도, 철학정치와 함께 패배의 잔을 마셨을 것이라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 현대정치의 경우도 이승만 정권 아래 이어지는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 시대에 그들의 독재정치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저명한 철학자 및 정치학자들은 그들의 급조된 사이비 이론과 한께 ‘미네르바의 부엉이’ 신세가 된 것을 우리는 아직껏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학자는 초지일과 ‘학문한다.’는 것으로 

생을 마감 한다는 것은 현실정치를 바로 잡아야 갰다는 명분으로 뛰어드는 정치행위이나 혹은 퇴임 후 강행 되는 사회봉사 못지않게 떳떳한 문화 봉사가 되라는 것이다. 

인류의 문화 발전을 이끌러온 지적학문도 문화의 범주에서 벗어 날 수는 없다. 문화는 다원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 끊임없이 주고받는 give and take 교접을 통해 더욱 건강해지고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를 조직화하는 학문의 이론도 새들의 좌우의 날개로 나눌 수 있듯이 좌우의 이론이 출현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우리문화의 핵을 이룬 사상은 너와 내 toi et moi(너도 나도,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등등)가 만나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며 공존하는 것 외 다른 것이 없다. 

현재 지구촌에 다시 전화(戰火)를 가져 올지도 모르는 사실들이 지구촌에서 계속 나타나고 있다. 아프가니탄 폭력. 이라크폭력, 우리나라의 남북 전시 상황 등 세상은 시시각각 전율을 하고 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는 것과 같이 폭력은 폭력을 불러들여 결국은 승자와 패자가 함께 공멸한다는 것을 미국 등 열강 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의 소유자로서 이성과 감성, 이와 기 등이 ‘음양상승(陰陽相乘)’에 의해 서로 뒤섞이면서 이루어지는 그 사상은 지구촌 인간의 수만큼 많아 

한없이 문화 창출의 힘을 지니고 있다. 

문화는 다양한 꽃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장식하는 화단과 같다. 이러한 문화의 다양성을 외면한 한국의 좌우의 극을 달리는 극단주의자들은 해방 후 마르크스주의를 금과옥조로 신봉한 나머지 평화로운 학원과 마을을 살인, 방화로 멍들게 한 것 같이 요즘에는 민주화 되는 과정에서 친미, 반공일변도로 그들에 대한 비판 의견을 신 마르크스주의 색깔의 올가미를 덧씌우고, 외신까지 그들의 입맛에 맞게 가위질 하는 것은 일종의 범죄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일방주의자들은 이기주의로 ‘나’만을 절대화하는 전제주의에 대한 열망으로서 좌우의 특징과 공존을 파괴하는 ‘분별없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릴라교수가 제시한 ‘인간에 내제된 다양한 영혼’은 결국 인간은 육체와 정신의 소유자로서 시간에 따라 지역에 따라 끊임없이 발전하는 영웅임을 감안하여 ‘나’와 우리 측만을 극대화하는 절대주의 , 결단주의, 독서주의, 지역 우월주의, 메시아주의를 극복하여 남을 인정하고 귀를 기울이는 호해주의 시대가 오기를 희망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