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외버스

by 젼정
시외버스 : 시내에서 그 도시 바깥의 특정한 지역까지 운행하는 버스. / 네이버 국어사전


20대 초반, 나는 친구와 가평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가기로 했다. 우리는 인천종합버스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움직여야 했는데 내가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우리는 오후 2시 정도가 돼서야 청평터미널로 향하는 시외버스에 탔다. 친구는 상당히 짜증이 나있었다.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 된 것은 내 탓이었다. 짜증도 잠시, 버스가 출발하자 우리는 늘 그랬듯이 실없는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짜증은 그렇게 농담에 밀려 모습을 감추었다.


익숙한 풍경에서 멀어지며 우리는 서서히 긴장감을 풀었다. 늦었지만 여행은 결국 시작되지 않았는가. 이름 없는 얼굴을 한 도로를 한 시간 넘게 달려 시외버스는 목적지인 청평터미널에 도착했다. 어떤 일이 펼쳐질까. 기대은 잠시였다. 돌아가는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버스 마감 시간이 예상보다 빨랐다. 예상은 개인적으로 소망했던 시간이므로 빠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막차를 탄다 해도 그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시간이었다. 지금의 나라면 여행의 대략적인 일정 정도는 미리 계획해놓고, 여행을 시작했을 텐데 그때의 나는 그야말로 모든 일에 막무가내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청평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인천종합터미널로 돌아가는만하는 신세가 되었다.

돌이켜 보면 20대 초반에는 근거 없는 자신감만 있고, 책임감은 없었다. 무엇을 하기 위해,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알려고 들지를 않았다. 그때는 그냥 시작하면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과는 확연히 반대다. 지금은 책임감은 있는데 자신감이 없다. 무엇을 하기 위해,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알지만 그냥 시작하기가 어렵다.

우리의 아쉬운 마음과는 상관없이 야속하게 날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버스를 탈 때만 해도 이렇게 빨리 날이 저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무작정 남은 시간을 믿었다. 시간이 나를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믿는 것이 다 이뤄지면 얼마나 좋을까. 믿음과는 무관하게 시간은 흘러갔고, 도착한 그곳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맥주나 사자.


포기가 빠른 것이 좋을 때도 있다. 터미널에 딸린 슈퍼에 들려 우리는 캔맥주를 샀다. 인천종합터미널로 가는 표를 끊고, 나란히 앉아 우리는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출발지로 되돌아가는 일에 대해 나는 생각했다. 언제 다시 밟을지 모르는 청평터미널 바닥에 신발을 앞뒤로 찍어내며 흔적을 남겼다. 버스가 왔다. 버스 뒷좌석에 앉아 우리는 몰래 맥주를 마셨다. 성인이 맥주 마시는 게 금지된 일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분명 몰래 마셨다.


꼴깍꼴깍.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신세에 마시는 맥주 맛은 대단했다. 그 맛은 계획을 완전히 실패하고 마셔야만 느낄 수 있는 맛이었다. 그 맛은 시외버스 뒷자리에서 몰래 마셔야만 느낄 수 있는 맛이었다.


우리 진짜 아무것도 못한 거야?

우리 이대로 진짜 집으로 가는 거야?


'진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나이였다면 근처에 숙소를 잡고, 하루 정도 놀다 올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당시에는 그럴 수 없었다. 그 나이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저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날이 깊어질수록 더 쓸데없는 말을 열심히 찾아냈다. 버스 안에 사람은 별로 없었다. 우리가 몰래 맥주를 마셔도, 숨을 죽이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큭큭거려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바깥은 버스를 더 화려하게 만들었다. 머리 위에 알록달록한 조명이 제법 아늑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시작하지 못한 여행에 대한 한을 풀기라도 하듯이 유난스럽게 깔깔거리며 맥주를 마셨다.

그날 그럴 수 있었던 건 내가 아닌 친구 덕분이라는 사실을 안다. 처음부터 끝까지 친구는 나를 탓했다. 그 탓이 타당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친구는 나를 탓했지만 어느 순간도 나를 미워하진 않았다. 친구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는 공중에 떠도는 우리의 말들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이 이야기를 그 친구에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그 친구와 결국 연이 끊겼다. 너무 잘 맞는 탓에 누군가 일부러 찢어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는 그 친구와 둘이 노는 시간이 좋았다. 모든 것을 말해도 괜찮은 그런 친구였다. 그 친구에게 나도 그런 존재였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목적지가 터미널인 여행을 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허무한 기분을 웃음으로 함께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날 달리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좀 특별한 여행을 했다. 우리의 말들은 도시의 바깥에 내렸다가 도로 버스에 올라탔다. 수많은 말을 하고도, 더 말하고, 그렇게 웃고도, 더 웃을 수 있는 말과 웃음의 여행이 문득 그리워진다.


청평터미널 바닥에 찍어놓은 흔적을 떠올려본다. 언젠가 다시 한번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야겠다. 얼굴 없는 공간에 떠도는 말들을 주머니에 살짝 담아와야겠다.


목적지 : 인천터미널 <-> 청평터미널



<마음의 단어 수첩>

시외버스 : 말과 웃음의 여행이 머물렀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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