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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Jun 27. 2022

산책과 사유


사유가 필요할 때 나는 산책에 나선다. 사유는 어디서나 할 수 있지만 시공간의 영향을 받는다.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면 새로운 것을 보게 되고, 그것은 새로운 생각과 이어진다. 항상 가던 길로 걷지 않고 다른 길로 접어들 때, 비로소 사유는 풍부해진다. 익숙한 길로 가는 것이 안전하고 편하긴 하지만 새로운 길로 가는 것이 꼭 위험하고 불편한 건 아니다.


얼마 전 혼자 동네 공원을 산책했다. 집에서 10 정도 거리에 있는 공원이다. 여름빛으로 옷을 갈아입은 공원에 시선을 빼앗겨 사진을 찍었다. 계단을 중간쯤 오를 무렵,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 아파트가 있어서 집에서 나는 소리인가 보다 하며 나는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갔다. 어느 길로 갈까 하다가 공원 한쪽에 있는 꽃밭을 구경하기로 했다.



어라, 아기 울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저기였구나. 반구형의 지붕이 있는 길 중간쯤에 유모차가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고 있는 여자가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 무렵 아기를 키울 때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기가 울 때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괴로워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기를 키워본 적이 있는가. 우는 이유를 말할 수 없는 아기의 울음의 이유를 찾기 위해 나는 수많은 방법을 찾아 헤맸다. 노력과는 달리, 그 상황은 늘 반복되었다. 그 순간이 오면 자동으로 스트레스가 솟구쳤다. 그냥 울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딸아이의 울음 끝은 길었다. 한번 울면 정말 끝장나게 울었다. 왜 하필 내가 키우는 아이가 이럴까. 엄마가 안아주면 뚝 그치는 아이도 있는데, 잘 울지 않는 아이도 있는데,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걸까, 자책도 참 많이 했었다.

그래서일까. 그 엄마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모차 근처에 가볼까 했는데 다행히 아기 엄마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빠가 곁에 있었다. 부부가 쩔쩔매며 우는 아이를 달래는 모습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걸었다.


정해진 방향은 없었다. 자주 가는 곳이 아니라 항상 걷는 길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걷고 싶은 대로 걸었다. 그것이 혼자 하는 산책의 묘미가 아닐까. 누군가와 함께 걸을 때는 내가 가고 싶은 길로만 갈 수 없다. 대화를 하느라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기도 어렵다. 아무래도 대화에 더 집중하게 된다. 혼자일 때는 그야말로 별 걸 다 보고, 들을 수 있게 된다. 나의 신체 기능이 잘 작동하는지 산책하며 점검해 볼 수도 있다.


잘 들리는가. 잘 보이는가. 잘 숨 쉬고 있는가.

그런 감각들이 수집한 사유를 잘 느끼고 있는가.


여러 나무들이 한데 모여 만든 초록의 풍경. 그곳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투영하는 빛.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은 살아 있었다. 그 순간 그곳에 포함된 나 또한. 




그렇게 걷다가 풀밭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열다섯 명 정도 되는 무리가 풀밭에서 모종삽을 들고, 바닥에 있는 흙을 파고 있었다. 꽃을 심는 날인가. 풀밭을 돌보는 날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풀밭에 서 있는 나무처럼 가만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보였다. 아니다.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사람은 서서 반복적으로 몸을 앞뒤로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풀밭의 리듬이 되었다. 나는 그 풍경을 지나 근처에 있는 그네 의자에 앉았다. 그네 의자에 앉아 산책하며 느낀 것들을 휴대폰에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그 사이 풀밭에 있던 무리가 내 앞을 지나갔다. 그들은 공원으로 소풍을 나온 모양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근처 박물관인 것 같았다.


그들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어른으로 보였다.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처럼 그들도 낮에 보호해주는 시설에서 시간을 보내는구나 싶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할까. 요즘 '이동권 보장'과 '장애인 돌봄'에 대한 뉴스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출근길에 시위를 해서 시민들을 불편하게 한다며 그들을 나무란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식이니 알아서 돌보라고 쉽게 말한다. 그렇게 단순하게 말해도 되는 문제일까. 출근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야 불편을 겪는 게 맞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 불편이 일상이다. 일상이니 감수하라고 하는 건 잔인하다. 더 나은 방법으로 해결하라고 하는 건 이상적이긴 하지만 현실에서 그게 통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동권 보장해주세요, 정중한 태도로 타당한 설명을 덧붙여 요청해도 들어주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장애인 돌봄에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가족이 장애인을 하루 종일 돌본다는 건 사실상 장애인에게도 보호자에게도 너무 가혹한 일이다. 양육자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는 건 맞지만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를 다 포기하게 해서는 안된다. 장애는 잘못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시민이고, 인간이다.


비장애인이 평생 비장애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다행인가? 나만 아니면 괜찮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될 수 있다. 그들이 밖에 나와 풀밭에서 흙을 파고, 박물관을 관람하는 일이 특별해져서는 안 된다. 그들이 일상을 누릴 수 있게, 그들의 보호자가 고립되지 않을 수 있도록 나는 그들의 삶을 응원하고 싶다. 이 자그마한 마음이라도 보태고 싶다.


산책을 하며 '앉아서 보는 세상'과 '나가서 보는 세상'의 적절한 조화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책과 영화, 뉴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안에서 보는 세상과 밖으로 나가 마주하는 세상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어떤 것이 뜨겁고, 어떤 것이 중요한지 분간하기가 어렵다는 생각도 든다.


그날 내가 본 세상 속 누군가는 지쳐 보였고, 누군가는 새로운 세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았고, 누군가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마음에 걸려, 풀밭에서 흙을 파내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라,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금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아이가 울면 함께 달래줄 수 있는 마음, 장애인들이 누리지 못하는 일상의 불편을 귀 기울여 들어줄 수 있는 마음, 그런 마음은 어디서 배울 수 있는 걸까. 나는 산책을 통해 그 마음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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