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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Mar 03. 2023

오늘도 동인천


동인천에 살지 않았을 때도 동인천은 내게 친근한 곳이었다. 동인천에 있었던 인천여자중학교를 2년 넘게 다녔다. (중3 때 학교가 연수동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3년을 꼬박 채우지는 못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네모난 교실에 있다가 2학년 때는 피자조각처럼 펼쳐진 건물 교실의 한 조각으로 들어갔다. 무의미한 말들이 교실 가득 쉼 없이 쏟아졌다. 마룻바닥을 밟을 때 나던 삐그덕 소리,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칠판에 머리를 박으며 열연하는 분필 소리, 초여름이 시작되면 나뭇가지들이 서로 뺨을 부딪히며 내던 사르르 한 소리가 아득히 떠오른다. 나는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명절이 끝난 주말 또는 용돈을 받은 날이면 동인천에 가곤 했다. 친구와 약속을 잡을 때면 주로 ‘대한서림’ 또는 ‘맥도널드’ 앞에서 만났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근처에 있었던 ‘세대교체’라는 옷가게를 꼭 들렀다. 그곳에 들어가면 시간이 이상한 형태로 바뀌는 것 같았다.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 아니라 불규칙하게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곳에는 수많은 옷과 액세서리들이 있었다. 지금이라면 쳐다보지도 않을 옷들인데 그땐 어찌나 오래 자세히 들여다봤는지 모른다. 가진 돈은 한정적인데 사고 싶은 건 많아 버거운 기분도 자주 들었다. 그것이 그리 슬프지는 않았다. 나는 이미 그런 기분에 익숙했다. 가지고 싶다고 다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어릴 때부터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조르고 떼를 쓰는 것도 상황도 주어져야 가능한 일이다. 가지고 싶은 것을 볼 기회조차 없었다면 애초에 조르거나 떼를 쓸 수도 없다. 가지고 싶은 것을 조금 볼 수 있게 된 세상에서 나는 기쁘고도 버거웠다.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골라내는 일이란, 지금도 쉽지 않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뭘 사고 싶었던 건지 기억도 안 나지만 나는 늘 애썼다. 무엇이라도 갖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채우기 위해 애쓰고 애썼다. 그 나이의 나는 세대교체에 서서 자주 그랬다. 세대교체는 세대가 달라지며 사라졌고 나의 욕망도 다른 색으로 채워졌다.


지갑에 좀 여유가 있는 날에는 신포동에 갔다. 꽤나 화려한 거리를 거닐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만 해도 신포동은 요즘 말로 하면 상당히 ‘힙’한 곳이었다. 유행하는 브랜드 매장이 줄지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때는 그곳을 걷는 것만으로도 노는 기분이 났다. 한 번은 큰맘 먹고 라코스테 매장에 들어가 양말을 샀다. 하얀색 양말 복숭아뼈 부분에 그려진 악어의 가격은 꽤나 사악했다. 교복을 입고 다녔던 시절 비싼 양말을 신는 것은 의미가 있었다.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 양말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건지. 그 비싼 양말을 왜 사고 싶었던 건지. 그런 양말에 대한 관심이 사라질 쯤에는 친구들과 돈을 모아 신포닭강정을 사 먹었다. 채 썬 양배추 위에 누워있는 케첩과 마요네즈를 젓가락으로 휘저으며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뭐였더라. 그리고 한동안은 다른 곳에서 노느라 동인천에는 자주 가지 않았다.


그러다 고3 수능시험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인천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부모님의 결정이었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나는 난생처음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처음으로 내 방도 생겼다. 나는 그 동네가 금방 좋아졌다. 태어나서 한 번도 누리지 못한 집에 대한 평범한 안정감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이제 더 이상 어깨를 쭈그리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동인천의 동네 생김새도 퍽 마음에 들었다. 그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집 앞에 있었던 도서관을 꽤 자주 드나들었다. 도보 15분 거리에 동인천역이 있었고 바로 집 앞에는 버스정류장도 있었다. 도보 10분 거리에 그 당시 꽤 인기가 좋았던 삼치거리, 냉면골목도 있었다. 동인천역을 중심으로 자유공원, 차이나타운과 신포국제시장, 배다리까지 있어서 친구들이 동네에 놀러 오면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는 맛도 있었다. 그 아파트에서는 1년이 조금 넘게 살았다. 이후에는 계속 동인천역을 중심으로 이사를 다녔다. 내 방도, 평범한 안정감도 유효기간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졌다. 부모님의 결정에 따라 옮겨다닌 집이었는데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동인천은 조금씩 달라 보였다.


결혼을 하면 이 동네를 떠나게 될 줄 알았는데 운명처럼 동인천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번 이사를 하긴 했는데 지금도 동인천에 살고 있다. 동인천은 구도심이지만 요즘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힙’한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잘 버무려져 있다. 아주 예전부터 동네 카페가 발달해 있었고, 오래된 가게도 많았다. 그대로이면서 새로운 것이 더해져 ‘동인천 감성’이 완성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레트로와 현대적인 트렌드가 공존하고 있는 동인천! 동인천에서 20년을 살고 있지만 나는 언제나 이곳이 새롭고 재미있다. 서울의 핫플레이스를 다녀와도, 세련미를 휘감은 백화점이나 아웃렛을 다녀와도, 역시 동인천만 한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는 내가 살아온 삶이 존재한다. 지나갔지만 사라지지 않은 기억들이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동인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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