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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Jul 30. 2021

우리에게 남겨진 낭만에 대하여

2021년에 보는 1990년대 홍콩영화

*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넷플릭스 메인 화면을 보다가 발견한 '첨밀밀' 포스터는 나를 홍콩 영화로 초대했다. 1990년과 2021년 사이에는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금은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이란 건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이기에 가능했던, 그 시절만의 무엇이 궁금해졌다. 

첨밀밀(1997)을 시작으로 천장지구(1990), 아비정전(1990), 세 개의 홍콩 영화를 보았다. 제목을 익히 들어왔기에 봤을 거라고 착각해왔던 영화였다. 천장지구에서 아화가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 아비정전에서 아비가 거울을 보고 맘보춤을 추는 장면은 우리에게 꽤나 익숙하다. 첨밀밀에서 흘러나오는 등려군의 노래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보지 않았어도 대부분 그 장면이나 노래는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다.


1990년대 만들어진 영화가 아직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직업이나 성격의 설정들이 감정을 더 극대화시켜주는 것은 사실이나 깡패, 납치, 여성 편력, 불륜 등의 키워드를 들이밀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지금이 아닌 그 시절, 이 영화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무엇을 남겼을까.





영화 '천장지구'는 오토바이를 타고 범죄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아화가 보석상 터는 일을 도와주다가 인질로 죠죠를 잡아가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천장지구의 뜻은 노자 제7장에 나오는 구절로, 하늘과 땅이 오래도록 변치 않다는 뜻이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죠죠는 거친 삶을 사는 아화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 아화가 그렇게 주먹질을 하고 다녀도 죠죠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지금 개봉된다면 깡패를 미화한다며 불매 운동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자신을 납치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납치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 남자의 이야기는 사실 판타지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는 이 판타지는 통한다.

남자 문제 때문에 건물에서 떨어져 죽은 어머니와 존재조차 알 길이 없는 아버지는 아화를 방황하게 한다.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아화에게 죠죠의 마음은 낯설고 두려운 동시에 놓치고 싶지 않은 감정으로 그려진다. 반면 죠죠는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다. 외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어 보이나 시시때때로 부재중인 부모 때문인지 죠죠의 마음 한편은 왠지 모르게 텅 비어 보인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에게 주는 마음은 절절하다 못해 가슴이 시리다. 나는 그런 그들이 행복해지기를 응원하고야 만다. 현실성이니 뭐니 하는 말은 제쳐두고, 우리 제발 사랑하게 해 주세요, 이런 마음으로.

아화는 깡패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머리를 가격 당한 아화의 코에서는 계속해서 코피가 흐른다. 아화 역을 맞은 유덕화는 계속해서 코피를 손등으로 닦아낸다. 그런 와중에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정신력이라니, 그것도 모자라 웨딩샵 유리를 박살내고 웨딩스레스 입은 죠죠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멋지게 달리다니, 죽음을 코앞에 두고 서로의 사랑을 맹세하는 둘을 보며 기분이 어리둥절해진다. 느닷없이 기도를 올리는 죠죠가 맞이하는 미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영화 전개상으로는 납득이 가지만 현실에 대입시키면 정말 '정신 빠진 커플'이다. 그러나 아화가 누구인가. 바로 유덕화다. 그는 우리를 그 시간 안에서 납득시킨다. 그의 멀쩡한 코가 헐기 전에 가짜 코피를 닦아주고 싶은 마음마저 들게 한다. 죠죠는 맨발로 그를 찾아 헤맨다. 둘은 다시 만났을까? 영화 제목처럼 아화와 죠죠의 사랑은 어디에서나, 오래도록 변하지 않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영화 '아비정전'은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비의 방황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영화다. '아비정전'이라는 제목의 뜻은 '아비의 일대기'라고 한다. 아비는 양어머니에게 입양되어 길러졌다. 아비는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양어머니는 그런 아비에게 자신이 잊힐까 두려운 마음에 친어머니에 대한 정보를 쉽사리 알려주지 않는다.

아비는 그 누구도 신뢰하지 못한다. 그런 그가 맺는 관계는 그저 얕은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그 순간에는 진심이라 우길만한 눈빛으로 상대를 사로잡는다. 아비는 매일 오후 3시 매표소에서 일하는 '소려진'을 찾아간다. 소려진은 아비가 무심코 던진 말의 덫에 걸려 그에게 빠져들고야 만다.


너와 나는 1분을 같이 했어.
난 이 소중한 1분을 잊지 않을 거야.
지울 수도 없어.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으니까.
- 아비 -



아비가 소려진에게 이 말을 할 때만 해도 몰랐다. 그가 그녀를 그렇게 매몰차게 대할 거라고는. 영화 아비정전의 영화에 대해 정보가 전혀 없었던 나는 이 대사가 둘 사이에 영원히 남는 로맨틱한 장면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내 예상은 보란 듯이 깨졌다. 소려진을 꼬시기 위해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나쁜 남자한테 빠지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아비는 소려진이 (사촌의 결혼 이야기를 꺼내며) 깊은 관계를 요구하자 불편한 기색을 대놓고 드러낸다. 소려진은 자신과는 마음이 다른 그의 곁을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지만 매력적인 바람둥이를 잊는 일이란 쉽지 않다.

소려진은 아비의 집 근처를 계속해서 맴돈다. 그런 그녀를 발견한 경관(천장지구의 아화, 유덕화가 또 나온다)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소려진과 경관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건가 기대를 품게 만든다. 그 사이 아비는 다른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루루'다. 댄서인 루루는 소려진과는 완전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소려진이 마음에 말을 꾹꾹 담아두는 사람이라면, 루루는 무슨 말이든지 바깥으로 내뱉고 마는 사람이다. 루루는 자신에게 싫증을 느끼는 아비를 보면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자신이 수려진과 같은 처지가 될 거라는 사실을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얼굴로 아비의 뒤를 쫓는다. 그 와중 아비의 친구는 쓸쓸한 얼굴로 루루의 곁을 맴돈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감정을 주고받지 않는다. 아비와 소려진도, 소려진과 경관도, 아비와 루루도, 루루와 아비의 친구도, 서로의 곁을 맴돌기만 할 뿐이다. 모든 관계는 어정쩡하게 시작되는 듯하다가 허무하게 끝나고야 만다.


발 없는 새가 있지.
날아가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번 땅에 내려앉을 때가 있는데
그건 죽을 때지.
- 아비 -


아비의 독백이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아비는 자신을 발 없는 새에 비유하며 한없이 방황한다. 자유롭고자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아비의 삶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이와 같은 설정은 '아비정전'이 만들어지던 당시의 홍콩이라는 국가의 지정학이 깊이 반영된 결과라고 한다. ‘발 없는 새’의 사연도 당시 홍콩 주민이 처한 상황과 심리를 은유해 결과를 보여준 것이라고. (하단 나무위키 참고)



영화 '아비정전'은 청춘, 사랑, 성장이라는 키워드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결국에는 '허무'에 이르는 인생을 담고 있다. 우리는 모두' 발 없는 새'의 삶을 살고 있다. 상대와 관계를 맺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모든 관계가 우리가 기대하는 영화의 해피엔딩처럼 끝나지는 않는다.


왕가위 감독이 1990년에 연출한 두 번째 장편영화인 '아비정전'은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 참패했지만 지금은 왕가위 감독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1분이 쉽게 지날 줄 알았는데
영원할 수도 있더군요.
-소려진-


과거가 된 시간은 지울 수 없다. 아비의 말처럼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기에, 우리는 이따금 그 시간을 떠올릴 뿐이다. 누구에게나 영원한 1분이 있다. 아비정전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은 영화에서 나오는 허무한 관계와 불안한 감정들이 우리의 삶의 순간 곳곳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화 '첨밀밀'은 앞선 두 영화와 7년이라는 시간 차를 두고 있다. 영화 첨밀밀의 뜻은 '매우 달콤하다, 다정하다'라는 뜻의 중국어이며, 등려군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홍콩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소군과 이교의 만남과 엇갈림을 반복하며 전개된다. 중국에서 홍콩으로 온 그들의 꿈과 목표는 많이 달랐다. 소군은 홍콩에서 돈을 벌어 중국에 있는 약혼녀 소정과 결혼하겠다는 꿈이 있었고, 이교에게는 무조건 돈을 벌어 성공하겠다는 야망이 있었다. 맥도널드에서 제대로 주문조차 할 수 없는 소군을 이교는 도와주는 척하며 이용한다. 둘은 같은 대륙 출신이지만, 전혀 다른 성향의 인물로 쉽게 가까워지기 힘들어 보인다. 공통점이 하나 있긴 하다. 대만 최고의 가수 등려군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교와 소군은 낯선 홍콩에서 서로에게 의지하기 시작하고, 그 감정은 사랑으로 싹튼다. 따자고 보면 소군에게는 약혼녀가 있으니 둘이 바람을 피우는 셈이다. 분명 잘못된 관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두 사람이 엇갈리는 것에 안타까운 마음이 생긴다.

이교는 자신의 야망을 펼치기는커녕, 등려군의 해적판 앨범을 팔지 못해 손실이 생기게 된다. 그 손실을 메꾸기 위해 모아둔 돈을 주식에 넣는데 1987년도 홍콩에 불어닥친 경제 한파로 빚을 지게 되고, 결국 그녀는 안마시술소에서 일하게 된다. 소군은 그런 그녀에게 손을 내밀 어보지만 이교는 차마 그의 손을 잡지 못한다.

둘은 같은 시간을 살다가 다른 시간으로 이탈한 사람처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이교는 안마시술소에서 만난 암흑가 보스 표형과 만나게 되고, 소군은 약혼녀 소정과 결혼을 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 이르렀음에도 둘의 감정은 식지 않고 서로에게 향해있다.



소군이 이교와 차를 타고 가다가 테레사 텡(등려군)을 발견하고 자신의 등에 사인을 받아온 장면은 꽤 인상 깊다. 서로를 향한 절제된 감정이 터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소군의 간절한 눈빛과 그것을 애써 외면하는 이교의 감정이 디테일하게 느껴진다. 이 장면 여명의 눈빛은 정말 불타오른다. 그의 눈에 빨려 들어가 '지금이라도 팬이 되겠어요'라고 맹세라도 하고 싶어 진다.

절제되어야만 하는 감정은 결국 깨진다. 소군이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이교는 괴로운 듯 핸들에 고개를 박는다. 실수로 '삑' 소리를 내는데 이 경적은 둘 사이의 감정을 폭발시킨다. 애절한 음악이 흐르고, 두 사람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감정을 확인한다.


당신도 마음을 정해야지. - 소군-
매일 아침, 당신 곁에서 눈뜰 수 있으면 족해. - 이교 -

마침내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나 싶었는데 결국 둘은 또 엇갈리고야 만다. 소군은 이교를 기다리지만 그녀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소군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 없어 소정에게 이별을 고한다. 소정은 무슨 죄인가. 로지가 남긴 돈을 소정에게 주는 것으로 둘의 관계는 끝난다.


뉴욕에서 또 다른 삶을 시작한 소군과 이교는 가까이에 있지만 야속하게도 서로를 찾지 못한다. 찾으려고 애써도 찾을 수 없던 시간들이 지나고 둘은 결국 등려군의 노래와 함께 재회한다. 얼마나 찾아 헤매었는지 알기에 두 사람이 마주한 모습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훈훈해진다. 세상에 정말 저런 사랑이 존재할 것만 같이 잠시 가슴이 설렌다. 

이교의 약혼녀 소정을 생각하면 이 둘의 만남을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다만 영화에서 두 사람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건 어쩔 수 없는 사랑이야'라는 마음이 생긴다.

친구는 우스갯소리로 스마트폰만 있었으면 금방 찾았을 거라며 '아이 러브 스마트폰!'을 외쳤다. 정말 그렇다. 그 시절과 지금의 삶은 속도 자체가 다르다. 스마트폰만 빨리진 것이 아니다. 삶의 모든 것들이 빠르게 변했다.




다양하고 실험적인 영화들이 가득한 넷플릭스의 메인화면에서 만난 이 영화들에는 지금 시대에 없는 무엇이 분명 존재한다. 지금은 경험할 수 없는 낭만이 그 시절에 있었다. 우체통에 편지를 넣어 보내던 시절, 전화카드나 동전을 손에 쥐고 공중전화기에 줄을 서서 전화하던 시절, 몇 시 어디에서 만나자는 말에 의지해서 약속을 잡던 시절이 때로는 그립다. 영화는 그때의 감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언젠가 보았던 것 같은 1990년대 영화를 2021년이 돼서야 제대로 봤다. 어쩌면 1990년대에 이 영화들을 봤다 해도 나는 몰랐을 것이다. 천장지구의 아화와 죠죠가 서로를 통해 채울 수 있었던 사랑 이상의 감정을, 아비정전에서 아비가 '발 없는 새'를 자신에게 빗대며 왜 괴로워했는지를, 첨밀밀에서 소군과 이교가 그렇게 재회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이다.

그 시절의 낭만이 그립다면, 망설이지 말고 이 영화들을 하나씩 꺼내보길 바란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서랍 속 물건을 통해 그 시절로 잠시 되돌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영화를 통해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 '아파야 청춘이다'라는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남겨진 낭만에 대해 생각해본다. 아무리 세련되게 행동하려 해도 감정에 휘둘려 촌스러운 행동을 하고야 말았던 젊은 시절의 민낯은 흐려지고 없다 해도 나는 안다. 그 시절의 낭만이 그리 쉽게 잊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참고 자료

1. 천장지구 https://namu.wiki/w/%EC%B2%9C%EC%9E%A5%EC%A7%80%EA%B5%AC

2. 아비정전 https://namu.wiki/w/%EC%95%84%EB%B9%84%EC%A0%95%EC%A0%84

3. 첨밀밀 https://namu.wiki/w/%EC%B2%A8%EB%B0%80%EB%B0%80

4. 아비정전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h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aver?code=10546

5. 첨밀밀에 나온 가수 관련 정보 -  등려군(영문 이름 테레사 탱)

https://namu.wiki/w/%EB%93%B1%EB%A0%A4%EA%B5%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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