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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Oct 13. 2021

이제 책 포장 아르바이트 안 구하시나요?

서로의 텅 빈 시간을 함께 채웠던 순간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 집 바로 옆에 도서 대여점이 생겼다. 1990년대만 해도 동네마다 도서 대여점이 있었다. 나와 동생은 그곳을 자주 드나들었다. 만화책에 빠져들기에 딱 좋은 나이였다. 처음에는 책을 빌려오고 반납하는 방식으로 다니다가 나중에는 사촌동생까지 끌어들여서 아예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함께 만화책을 읽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차 늘어났다. 책방 주인은 노총각 아저씨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우리는 그 아저씨를 엄청난 노인네처럼 여기면서 사춘기를 앞둔 어린이답게 약간 버릇없이 굴었다.


책방 아저씨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남동생이 짓궂게 굴면 표정이 좀 불편해지긴 했으나 어른으로서의 품위는 늘 잃지 않았다. 머리 뚜껑이 열릴 정도로 약을 올려도 본색을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꽤 잘 다스렸다. 그곳은 어느새 우리의 아지트가 되었다. 어느 날 책방 아저씨는 우리에게 아르바이트를 제안했다. 책 표지를 싸는 아르바이트였다. 사람들이 책을 자주 빌려 보면 만화책 겉표지가 너덜너덜해지는 탓에 책을 두꺼운 비닐커버로 포장해야 했는데 그걸 우리에게 해보라는 것이었다. 아르바이트 조건은 책 한 권당 50원인가 100원 정도였고, 자신이 포장한 만큼 검사를 받은 다음 책을 빌리거나 현금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이 솔깃한 제한을 받아들인 우리는 도서 대여점 중앙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사장님은 주로 안에 있는 방에서 TV를 시청했다. 그렇게 한가하면 본인 스스로 해도 될 일을 굳이 왜 우리에게 시키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방 아저씨는 여자 친구도 없었고, 놀러 오는 친구도 거의 없었다. 얼굴은 평범한 원숭이를 닮았다. 동그랗고 순진한 표정을 한 원숭이는 방에서 나오지 않고 우리가 잘하고 있는지 분위기만 살필 뿐이었다.


책 포장하는 일은 눈썰미와 성실한 노동력, 빠른 손재주를 요구했다. 두꺼운 비닐 포장은 손으로 꾹 눌러주지 않으면 들떠서 지저분해 보였다. 동생은 책 포장을 하다가 몰래 만화책을 읽곤 했다. 규칙을 어긴 것이었다. 오징어 게임이었다면 바로 끌려나가 좋지 않은 꼴을 당했을 텐데, 책방 아저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놈을 살려두었다. 나와 사촌동생은 아르바이트에 충실히 임했다. 깔끔하고, 정확한 포장을 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날이 저무는 것도 모르고 우리는 그곳에서 책을 포장하고, 그날 빌릴 책을 골랐다. 어떤 날은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그곳에 있기도 했다.

책방 아저씨는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어쩌면 집에 좀 가라고 눈치를 줬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 눈치를 능청스럽게 받지 않았을 뿐. 우리는 그곳의 단골 고객이자 쉽게 돌아가지 않는 진상 고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아저씨에게 '원숭이 책방'이라고 하기 시작했다.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동생은 책을 훔쳐보는 것도 모자라서 보지 못한 나머지 책을 보란 듯이 책방 아저씨에게 흔들며 집으로 도망쳤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살면서 무슨 생각으로 동생이 그랬는지 지금도 모를 일이다. 그럴 때면 책방 아저씨는 약이 잔뜩 오른 얼굴로 문 앞에 서있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성장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남자 어린이의 고약한 장난을 그는 지켜보기만 했다. 어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다.


이미라의 '인어공주를 위하여', 원수연의 '풀하우스', 일본 만화책 '오늘부터 우리는', '아기와 나' 외에 많은 만화책들을 보며 우리는 그 시절을 보냈다. 이은혜의 '블루'의 인기도 대단했다. 미완결의 신비주의로 인한 아쉬움을 우리는 '블루' 주인공이 나온 노트로 달랬다. 이 글을 쓰면서 만화책 '블루'가 완결되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천천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봐야겠다.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하니' 노래를 '달려라, 달려라, 원숭이 책방'으로 불렀던 우리는 이제 그 책방 아저씨쯤의 나이가 되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대했나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책으로 채울 수 없었던 것들을 우리는 그곳에서 읽고, 만졌다. 책방 아저씨는 자신의 외로움을 우리의 소란스러움으로 채웠던 게 아닐까. 서로의 텅 빈 시간을 우리는 어쩌면 함께 채웠던 게 아닐까. 동그랗고 순진한 표정을 한 원숭이 책방 아저씨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원숭이 책방 아저씨! 이제 책 포장 아르바이트 안 구하시나요?


혹시라도 그를 만나게 된다면 웃으면서 이렇게 묻고 싶다. 이제 오랜 세월이 지나 길에서 그를 마주친다 하더라도, 가까운 거리에서 각자 커피를 마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매일 꾸준히 몸과 마음을 키워나갔던 그 시절 우리에게 그곳은 참 소중했다. 책방 아저씨는 우리가 함께 한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을까?


도서 대여점 중앙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높게 쌓인 만화책을 하나씩 클리어하다가 이따금 캄캄해진 밤을 낯설게 바라보았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진다.




* 참고 : ‘도서 대여점’ 명칭이 맞지만 어릴 때 부르던 ‘책방’을 혼용하여 기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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