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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짤리짤리 Dec 30. 2022

샤넬지갑 속 맥도날드 쿠폰

격차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소비

 한 손에는 수저를 다른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바삐 움직이는 아이들. 한 손에는 TV리모컨을 또 다른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부모. 세대를 불문하고 작은 단말기를 통해 매 순간 온라인에 접속되어 있는 상태로 지내는 것은 이제 어디에서나 익숙한 모습이 되었다. 음성으로 소통하던 시절 전화번호부 목록은 오프라인에서 관계를 맺은 사람들로 채워졌지만, 영상이나 이미지가 소통의 중심이 된 지금  SNS 이웃 목록에는 온라인에서만 교류하는 이들로 채워진다.

 방식이 다를 뿐 여전히 타인과 소통을 하고 있음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 둘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어릴 적 학교에서 만났던 친구들은 가족관계, 생활수준, 학업 성적등 많은 부분을 공유했지만 SNS를 통해 만난 친구들은 서로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에 의해 파악되는 얕고 넓은 관계의 확산은 자신의 내면적 가치를 높이는 일 보다 그저 '가치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질 동기를 제공하게 된다.


 무기력에 빠진 상태가 아니라면 누구나 지금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서고 싶은 성장 욕구를 가진다. 어떤 이들은 건강이나 인격, 직장인이라면 연봉이나 직급, 운동선수들에겐 감각이나 실력 등이 될 것이다. 이러한 성장들은 복권에 당첨되듯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차곡차곡 단계를 쌓듯 수준이 올라가고 이를 위해서 의식적이고 지속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통한 즉각적인 반응에 익숙해지고, 인내심이 부족해진 사람들은 즉흥적 보상을 얻을 수 있는 대안을 찾는다. 대표적인 것이 SNS다. 물건, 음식, 장소, 몸 네 가지로 압축되는 자기 자랑 SNS가 작동되는 배경에는 승인 욕구가 있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말한다. '남의 시선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아' 라고 말하는 이들도 대게는 칭찬을 받으면 기분 좋아한다. 바로 승인욕구 때문이다. SNS는 '좋아요'나 '하트'의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잠재된 승인욕구를 채워준다.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고가의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다. 값비싼 물건들이 일종의 지위재 역할을 하며 자신을 더 높은 가치의 사람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장치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혹자는 명품소비가 그저 자기만족이라고 주장하지만, 무인도에 혼자 남아서도 자신을 명품으로 두르고 싶은 동기가 생길까? 그저 거추장스럽게만 여겨질 것이다. 어쩌면 자기만족이라는 것도 결국 취향의 충족이라기보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의 충족에 더 가까운 것일 수 있다.

 멋진 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비록 왜곡된 모습일지라도 상관없다. 스마트폰은 내 이웃이나 친구를 넘어 지구 반대편 나와 접점이 없어 보이는 이들의 삶까지 훔쳐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더 많을 것들을 보고 더 많이 비교를 한다. 견물생심이다. 보면 가지고 싶고, 자꾸 볼 수록 욕망 또한 커진다.


 많은 청년들이 유명브랜드의 멋진 운동화를 원한다.  알고리즘을 통해 자꾸 보다 보면 마치 나만 빼고 다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편의점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행여 놓친 할인혜택은 없을까 구석구석 살피고, 얼마 안 되는 추가 적립금을 받기 위해 열심히 상품후기를 올리는 이들이 명품 하나를 가지기 위해서는 거침없이 지출한다. 고가의 제품을 구매하고 남에게 펼쳐 보이는 행위는 '플렉스'라고 표현되며 젊은 층에서 일상적으로 보이는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어 버렸다. 덕분에 경기 부진 속에서도, 청년 취업난이 심화되는 상황에서도 명품 브랜드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이제 명품산업의 성장은 단지 빈부 격차의 확대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초저가, 가성비를 추구하는 집단과 명품 소비층간의 경계가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소득격차로 인한 소비양극화가 아닌 소비 성향 변화로 인해 양극단의 소비를 동시에 하고 있는 이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과도한 명품소비는 일종의 열등감 표출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과 현실 속 자신 간의 괴리를 값비싼 물건들이 채워줄 것이라고 기대 하는 것이다.  어깨에 걸친 명품백 로고와 손목에서 빛나는 명품시계가 마치 자기 자신도 빛내 줄 것만 같다. 하지만 빛은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날 때라야 주목받을 수 있는데 그러기엔 이미 너무 흔해져 버린 것이 아닐까. 기대와 달리 사람들은 나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 내가 모든 타인에게 관심을 두며 살아가지 않는 것처럼. 철저히 개인화되고 파편화되고 있는 사람들은 현실 속에 나보다 개인 단말기 스크린에 열중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세상이 변하면 변하는 대로 맞추어 가는 것이 보통의 우리 삶이니 오늘의 현상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사회적 격차가 심화할수록 자신을 포장하려는 욕구 또한 커질 수 있다. 다만 '자기 가치를 높이는 일'과 '가치가 높은 것처럼 보이는 일' 사이의 균형은 필요해 보이다. 보이는 격차의 간극을 줄이려는 행위가 계속되는 동안 실질적 격차는 더 커져 버져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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