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사 템플스테이 (1) | 시계는 필요 없다
몇 시간을 달리던 버스는 잠시 휴게소에 정차했다. 금강휴게소는 바로 옆에 강이 흐르는 위치에 자리했다. 화장실이나 식당도 통유리로 되어있어, 어디서건 산과 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진정 휴식하고 싶게 만드는, 또 잠깐이지만 정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탁월한 입지의 휴게소였다.
점심시간이 지난 시점이라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먹을 걸 좀 사서 들어갈까 했지만, 버스에 냄새를 풍길 것 같아서 물만 사서 돌아갔다.
넘치는 배려심으로 돌아와 승차한 버스엔 오징어 냄새가 가득했고, 다른 사람들은 죄다 무언가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배가 더 고파지는 것 같았다.
다른 이들의 음식 냄새와 함께 버스는 한 시간 남짓을 더 달렸다. 시골로 시골로 달려 도착한 곳은 고령 터미널, 정식 명칭은 '고령 시외버스 정류장'이었다. 작고 낡은 대합실에는 대부분이 노인들이었다. 때문에 외국인 여행객 두 명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다음 버스를 타고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 이름은 '가야'였다. 버스를 타기 전, '가야'에 가는지 기사님께 확인 후 버스에 올랐다.
시골 버스는 정해진 승차장이 아닌 곳에도 승하차를 해주는 듯했다. 어르신 승객들과 버스 기사님은 잘 아는 사이인 듯 친밀한 일상 대화를 나누었다.
그 버스 안에서 나는 혼자서 외지인이었다. 이방인은 어떻게든 눈에 띄는 법이다. 정류장 안내 음성도 나오지 않는 버스에서 내릴 곳을 놓칠까 창밖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가야 내리세요."
다행히 기사님과 승객 할머니께서 내가 내릴 곳을 알려주셨다. 덕분에 무사히 도착했다.
마지막은 택시였다. 가야 정류소 앞 택시회사 사무실로 보이는 곳에는 택시가 몇 대 줄줄이 서있다. 기사님께 목적지가 심원사라고 말씀드리자, 템플스테이를 하러 온 줄 단번에 아셨다. 첫 번째 심원사를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내용의 대화를 기사님과 주고받았던 기억이 났다. 혹시 그때 그 기사님이셨을까?
택시를 타고 15분 정도를 달려 마침내 심원사에 도착했다.
부천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고령, 고령에서 가야, 또 심원사까지 오는 긴 여정을 끝낸 시각은 오후 3시 즈음이었다.
가야산 자락에 위치한 심원사는 여전히 고요했고, 여전히 그때의 스님과 보살님이 계셨고, 여전히 흰 개가 있었다. 6년 전 여름, 2박 3일로 짧게 머물렀던 곳인데도 여전한 것들이 반가웠다.
안내받은 방은 예전처럼 깨끗했다. 방에는 전기포트와 차가 마련된 작은 테이블까지 있었다. 정말 느린 시간을 보내다 갈 수 있겠다는 안심과 기대가 들었다.
템플스테이 담당하시는 분께서는 내가 6년 전에 왔던 걸 기억하고 계셨다. 놀랐다. 예약 확인 전화를 통해 잠시 대화를 나누었을 땐, 이름이 기록에 남아있어서 아시는 것이겠거니 했는데, 진짜 기억하고 계신다니.
"그때 와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셨잖아요. 이번에도 아무것도 안 하실 거예요?"
"이번엔 다 할 거예요."
아무것도 안 했다. 향 만들기도, 식물원 구경도 하지 않고 방에만 머물렀었다. 그에 대한 아쉬움이 이곳을 다시 찾게 만든 것이기도 했다. 때로는 일부러 아쉬운 점을 남겨두기도 한다.
언젠가 다른 절에서 템플스테이를 했을 때, 떠나던 날 스님이 하셨던 말이 오래 남았었다.
"인연이 된다면 언젠가 또 만나겠죠."
이전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아쉬움이 있던 것도, 그래서 다시 오게 된 것도, 또 이곳에 그대로인 분들을 만나게 된 것도 모두 '인연이 된다면'에 해당하는 것일까.
스치는 인연이 되었을지도 모를 나를 기억해주신 분들 덕에 뭉클해졌다.
6년 사이에 이곳에는 건물도 많이 늘어났고, 또 계속 늘어나고 있다. 같이 일하시는 새로운 분도, 처음 뵙는 스님도 계셨다.
그동안 내 경험들도 많이 늘어났다. 많아진 경험들을 보이는 것으로 어떻게 만들어내느냐가 나의 숙제이다. 더 완성도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싶어서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급하게 써서 뒤도 안 돌아보고 내버릴 숙제.
주신 옷으로 갈아입고, 긴 여정에 지친 몸을 뉘었다. 빗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며 산 아래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시원한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있으니 절로 잠이 들었다.
저녁 공양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짧고 달았던 낮잠을 깼다. 점심도 거른 채 굶주리고 있었던 나는 밥때를 알리는 맑은 소리에 단번에 일어났다.
심원사는 몇 군데 다녀본 템플스테이 절들 중 밥이 가장 맛있는 곳으로 기억에 남아있었다. 여름을 가득 머금은 싱싱한 야채들과 함께 산속에서 먹는 밥이 맛이 없으래야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저녁 메뉴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물과 깻잎장아찌, 총각김치, 감자조림, 해초, 물김치에 된장국까지 나왔다. 인스턴트 음식에 찌들었던 불쌍한 내 몸이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식물도 동물도 아닌 인공의 화학품만 들어붓느라 소화시키기 힘들었을 내 몸에게 미안했다.
(*템플스테이라 하면 다 발우공양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휴식형으로 다녀온 나는 한 번도 발우공양은 해보지 않았다.)
식후에 절을 한 바퀴 돌고 내가 머무를 방으로 돌아와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흘러가는 구름을 멍하니 구경했다. 흐린 날씨 때문인지 구름이 빠르게 흘렀다. 흘러가는 구름을 구경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실려가는 구름을 보는 시간은 아무리 오래 보고 있는다 하더라도 몇 분 되지 않는다. 짧은 시간을 느리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다.
바람을 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구름의 흐름을 보는 것, 둘째는 나무의 흔들림을 보는 것이다. 도시를 벗어나 얻는 소득 중 가장 값진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바람을 보고, 시간을 느리게 보내는 것.
그렇게 흘러가는 것들을 찬찬히 살펴 주면서 느리게 살고 싶었다.
시계에 적힌 숫자에 얽매이지 않고 해가 뜨면 아침인 채, 해가 지면 밤인 채로.
샤워를 하고 난 뒤 겉옷을 걸치고 나가 깨끗한 바람을 몸에 뒤집어썼다. 한결 싱그러운 내가 된 듯했다. 그렇게 여름밤의 바람을 보고 듣고 만지고 마시면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