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Everything Every Where All at Onc
최근 우리 사회가 묻지마 범죄로 인해 시끄럽다. 여러 가지 분석이 있지만 가장 분명한 것은 이것이 자기 파괴적 행위라는 것이다.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것의 결말은 본인도 예측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것은 자기 파괴이다. 이런 행위는 자기에 대해 어떤 희망도 기대도 존재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한 사회가 특정한 사회 구성원에게 어떤 희망도 기대도 주지 못한다면 이것은 개인의 문제일까? 그 사회의 문제일까?
'Everything Every Where All at Once'는 올해 아카데미에서 각본, 감독상 등 7개 부문에서 상을 받으며 화제가 된 영화이다. 영화는 주인공 에블린의 선택에 따라 분화되는 수많은 멀티버스를 보여주면서, 우리는 왜 이토록 의미 없는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 낼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준다. 영화 속 주인공인 현재 우주의 에블린은 수많은 선택지 중 아무 능력도 없는 가장 '하찮은' 인격체로 살아가고 있다. 남편은 이혼하자고 하고, 전 재산인 세탁소는 국세청 조사에 직면해 있고. 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있는 총체적 난국 속에 있다. 그런 에블린에게 갑자기 우주의 멸망을 막아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사명이 떨어진다. 영화는 난데없이 부여된 사명 아래 영화배우, 가수, 쿵후 고수, 요리사 등 과거 선택 속 다양한 우주에 존재하는 에블린의 능력을 '버스 점프(verse jump)'를 통해 현재로 끌어와 싸우거나, 아예 다른 우주로 이동해 싸우며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영화는 두 가지에서 울림을 주었다.
첫째는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악당도 사실 우주 멸망이 목적이 아니다. 너무 의미가 없고 허무한 나머지 자기 파괴가 목적이고 그 산물로 우주 멸망이 따라오는 것이다. 처음에는 에블린도 이 악당의 허무주의에 설득당한 나머지 같이 죽으려고 한다. 그러나 에블린을 새롭게 삶의 한가운데로 불러낸 것은 존재의 역할, 딸 조이에 대한 엄마로서의 역할에 대한 자각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만이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고 희망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도(Everything) 되고, 어디든(Everywhere) 갈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가 존재하는 지금 여기라는 것이다.
둘째는 어떻게 이 관계의 의미를 살려 우주 속 티끌 같은 존재라는 존재론적 허무를 극복하고 살아내게 할 것인가? 영화에서는 다정함이라고 얘기한다. 에블린에게 존재 역할에 대한 자각을 일으킨 것은 바로 남편 웨이먼드의 다정함이었다. 그는 모든 것이 파괴되려고 하는 혼돈에 휩싸인 현재 우주에서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음에도 에블린에게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다정함을 보이라고. 그리고 에블린은 비록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던 무능력한 남편이었지만, 절망에 빠져있던 그녀를 늘 행복하게 해준 것은 그였고, 그와 함께해 온 인생이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개인적으로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자주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라고,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 사랑이 아니라고, 조용필이 바람의 노래에서, 비틀스의 존 레넌이 마인드 게임에서 '사랑이 답이다'라는 노래를 부른 것은, 아마 그들도 사랑이, 다정함만이 세상을 구원할 줄 알았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