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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찬희 Jun 13. 2020

우리는 아직 그대로입니다

엄마와 동유럽으로 첫 여행을 떠난 것은 2017년 9월. 나는 중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2017년 7월 중순에 한국으로 돌아갔다. 약 2년의 시간 동안 떨어져 지내다가 여행을 함께 떠난 것이다. 우리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와 체코 프라하를 여행했는데 두 도시 모두 영어 사용이 수월한 도시였다. 엄마는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 내가 여행 일정 대부분을 리드했다. 


서로의 여행 스타일을 잘 모른 채 떠났던 첫 여행이어서였는지, 여행 초반에는 엄마랑 여행 스타일이 맞지 않아서 서로 간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 나는 오전에 나가서 빨빨 거리며 돌아다니길 원하는 것에 반해, 우리 엄마는 아침 일찍 눈을 떠서 조식을 먹고 다시 호텔방에 가서 적정 시간의 휴식을 취한 뒤 오후가 되어서야 나가길 원하셨다. 내 기억에 우리 엄마는 항상 젊은 엄마였기 때문에 엄마가 이렇게 체력적으로 힘들어하실 줄은 몰랐다. 엄마가 벌써 중년의 나이에 들어섰다는 것을 그때서야 받아들인 것 같다. 고작 2년 동안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엄마가 이렇게 변해버리다니. 엄마가 늙어간다는 슬픔보다도 흘러가버린 시간에 대한 배신감이 컸다.


비엔나에서 체코로 가던 날 왠지 모르게 짜증이 솟았다. 엄마의 여행 스타일이 내 일정을 따라주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불만, 내가 엄마를 리드한다는 못난 자신감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였던 것 같다. 캐리어도 끌랴 휴대폰으로 지도도 확인하랴, 나쁜 마음이 내면에서 몽글몽글 솟아났다. 보도블록 위를 아무 말 없이 쿵쾅쿵쾅 걸어갔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몇 분을 더 걷다가 엄마가 버럭 화를 내셨다. 짜증 좀 부리지 말라면서. 


나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짜증이 아니라 기차 시간이 다가와서 신경도 쓰이고 빨리 가야 할 것 같아서 아무 말 없이 빨리 걸은 것뿐'이라고 변명을 했다. (어차피 변명을 할 거면서 뭐하러 짜증을 부리는 걸까?) 그러자 엄마가 "원래는 내가 너희를 데리고 다녔는데, 여기서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너한테 끌려다니니까 기분이 너무 이상해. 말도 안 통하는 이 곳에서 나는 그저 네 빠른 걸음에 맞춰 따라가기만 하는 거잖아"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도 변하고 우리 엄마도 변해버린 걸까'라는 생각에 슬퍼졌다. 흘러간 시간이 바꿔버린 이 변화를 어떻게든 되돌리고 싶어 졌다.


기차 위에서 캔맥을 나눠 마셨다.

부모님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기가 되어간다는 말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늙고 힘이 빠지면서 자식들의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가 되어 간다는 것이다. 누가 했는진 모르겠지만 나는 이 말이 싫다. 우리 엄마는 아기가 된 것이 아니다. 우리 엄마는 여전히 나를 이끌어주시는 존재고 나를 보살펴 주시는 존재다. 엄마는 그저 말이 안 통하는 외국에 있었을 뿐이었고 나는 여전히 감정 조절을 못하는 이기적인 어린애였을 뿐이었다고 믿는다. 흘러 버린 시간이, 그리고 우리 모녀 사이의 공백기가 잠시 바꿔놓은 우리의 변화를 나는 다시 되돌리는 중이다. 하지만 시간의 불가역성으로 인해 우리 관계에는 또 변화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또다시 변화가 찾아온다면 그때는 좀 더 성숙한 방식으로 변화하겠노라 다짐한다.


그리고 한 달 뒤 제주도로 떠난 여행에서는 엄마가 나를 리드했고, 그다음 해에 일본 오사카로 떠난 여행에서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우리 모녀는 함께 길을 잃었다. 우리는 변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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