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마트의 골목진 겨울을 따라

by 찬희

새로운 도시를 맞이하는 일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잘 익숙해지지 않는다.


몽트뢰를 떠나 체르마트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마음의 작은 두근거림이 초봄처럼 샘솟았다.


기차는 레일 위를 달리며 조금씩 흔들렸다.

쿠궁, 쿠궁,

기차의 박동과 심장의 박동을 구별할 수 없게.


차창 밖으로 흰 철로가 구불거리며

기차 머리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몽트뢰에서 겨울을 잠시 잊었던 나는

겨울을 향해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체르마트의 겨울은


태쉬 역에 내린다. 왜 체르마트 역이 아닌가 하면, 아무래도 비싼 숙소 값이 그 이유였다. 체르마트 역에서 기차를 타고 15분 정도면 훨씬 싼 값에 예약할 수 있는 숙소가 나오는데, 돈을 아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체르마트로 출퇴근을 반복해야 했다. 아무리 겨울이라지만 숙박비가 너무 비싸다.

Walliserhof 호텔로 가는 길, 얼은 눈길 위로 캐리어가 소리 없이 굴러갔다. 미끄러운 바닥 탓에 펭귄 걸음을 걸어내야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호텔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호텔 주인은 온화한 미소를 보이며 커다란 나무 열쇠를 내밀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하마터면 아래로 고꾸라질 뻔했는데, 예고도 없이 계단이 가파르게 시작되고 있었다. (아고다에서 본 방은 이게 아니었는데, 주인이 계단은 쏙 빼고 올렸나 보다.)



3층에 있는 반지하. 처음에는 이런 이상한 구조가 낯설기만 했다. 심지어 조명 스위치가 2층에 있어서, 자기 전엔 계단을 타고 올라가 불을 꺼야 했다. 불이 꺼진 뒤에는 깜깜한 칠흑 속을 내려오다 발을 헛디딜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어느새 이런 불편함은 여행의 미화 속으로 사그라들었다.



체르마트 역에 내리면 가장 먼저 보이는 초록빛의 롤렉스 로고. 나의 체르마트 여행은 저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예상과 달리 마을은 좁은 골목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골목마다 겨울의 차가운 푸른빛이, 동시에 포근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눈[雪]의 차가움과 따뜻함이 모두 느껴졌다. 역설적이게도 그 해의 겨울은 가장 춥지만 동시에 가장 따뜻한 계절이었다. 나는 골목진 겨울을 따라 이끌리듯 걸어갔다.



검은 말이 끄는 짙붉은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도 체르마트 하면 떠오르는 클래식한 이미지,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고풍스러운 인상은 여행의 첫 장면이었던 한 마차에서 비롯되었다. 립스틱 같은 짙붉은 색의 마차와 그와 대비되는 흑색의 말은 단숨에 마을에 신비감을 불어넣었다.


마차를 기점으로 마을 곳곳에서 동화 같은 장소들이 이어졌는데, 어느 골목에서는 해리포터에서나 볼 법한 호그스미드 같은 마을도 볼 수 있었다. 짙고 투박한 나무로 지어진 큼지막한 집들이 돌바닥 골목을 따라 줄지어 있었다.

호그스미드 같은 마을

잠시 아담한 나무 벤치에 앉아 겨울의 풍경을 바라보자, 감탄과 함께 내뱉은 하얀 입김이 눈앞 산봉우리에 구름처럼 드리웠다. 하늘의 파란빛, 눈[雪]의 푸른빛, 그리고 구름의 흰 빛과 눈[雪]의 흰 빛은 미묘하게 달랐다. 그리고 문득, 한국에서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한국의 하늘이나 스위스의 하늘이나 같은 하늘일 텐데, 일상에서는 왜 이런 것들을 놓치고 사는 건지. 같은 하늘 아래에 있으면서도 여행자로서의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일상의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일상의 권태로움에 젖어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던 이유는, 어쩌면 ‘영원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제의 하늘, 오늘의 하늘, 내일의 하늘, 모레의 하늘... 영원할 것만 같고 늘 똑같아 보이며, 때로는 지루하고 지겨워 보이기까지 하는 저 하늘—나아가 우리의 일상—은 영원하지 않다.


이틀 뒤면 떠나는 체르마트의 하늘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알면서도, 내가 어디에 있든 매일의 하늘—나아가 매일의 일상—또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금방 잊어버린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제야 비로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게도 그제야 아름다웠다는 것을, 아름답다는 것을.

마을이 주는 새로운 자극들이 끝없이 이어진 탓에, 나는 홀린 듯이 거리 곳곳을 쏘다니며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느 오르막길에서는 야외 노천탕에서 몇몇 사람들이 온천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마치 소설 설국에 나오는 장면을 보는 듯했다. 더운 김이 조심스레 피어오르는 온천 맞은편에는 겨울에 흠뻑 물든 설산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온천을 지나 다시 광장에 다다르자, 새파란 유리로 지어진 이글루 근처 광장 한복판에는 컬링장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마을 한복판에 컬링장이라니, 새하얗게 얼어붙은 컬링장 위로 스톤이 부딪히는 청아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던 나는 또각또각거리는 말발굽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꿈을 꾸는 듯 흰 말이 이끄는 푸른 마차가 내 눈앞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어쩌다 보니 붉은 마차로 시작한 하루가 푸른 마차로 마무리된다. 어느덧 저녁의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고 아까 입구에서 봤던 초록빛의 롤렉스 로고가 더 선명해졌다. 태쉬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되돌아가는 길, 문득 온기가 느껴져 시선을 옮겨보니 작은 가게 하나가 있었다.


체르마트 역 입구의 체스넛(Chestnut) 가게.

그 고소한 군밤 향이, 추운 칼바람이, 크리스마스 캐롤과 섞여 불어왔다. 겨울의 추운 냄새가 섞인 구운 밤 냄새, 그 무의미했던 향 하나에 체르마트의 기억이 입혀졌다. 여행을 하면서 백지 같던 노래에, 백지 같던 향기에, 백지 같던 무언가에, 의미와 기억을 칠하게 된다. 한국에 돌아가 그때의 노래와 그때의 향을 맡게 된다면, 잠시나마 흑백의 일상이 알록달록해질 수 있으려나.

© Stella Jang, The Christmas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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