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되지 않은 여행

일단 가보기로 하다

by 찬희

어쩌다 보니 인천공항이었다.


공항의자에 멍하니 앉아있는 나.

출국장 앞 번잡한 소음 속에 휩싸여 있었지만, 정작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불안한 정적이 느껴졌다.


손에 쥔 비행기 티켓 한 장이 미세하게 떨린다. 그 흔들림이 어쩐지 마음의 떨림과 겹쳐 보이는 듯하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비행기 티켓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나.

불과 며칠 전, 갑자기 혼자 여행을 가보겠다며 환불도 안 되는 항공권을 예매해 버렸다.


내가 왜 그랬을까.


사실 이때만 해도 몸이 많이 아팠다. 출국을 고민하던 나는 아빠와 힘겨운 통화를 이어나갔지만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우유부단한 나로서는 답답한 마음뿐이었으나, 일단 수속부터 하고 생각해 보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도저히 여행을 갈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일단 수속이라도 하고 보자는 것이었다.


출국장까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수속 대기줄을 섰다. 문득 작년 여름의 기억이 잠시 겹쳐 보였다. 그때는 한 달간의 유럽여행을 앞두고 설렘만 가득했었는데, 지금은 어쩌다 침울한 여행을 시작하고 있는가 싶어 마음이 착잡해졌다. 어두운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던 나는, 주변의 어수선한 분위기—특유의 나만 빼고 들뜬 느낌이라고나 할까—속에서 일종의 소외감을 느꼈다.


비행기 탑승 두 시간 전, 수속을 일찍 마치고 탑승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한참을 고민했다. 비행기 표를 취소할 것인지, 그냥 가볼 것인지. 솔직하게 말하면 그냥 비행기 표를 취소하려고 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그렇다고 취소를 하기엔 이백만원의 돈을 버려야 했다. (이것도 아니지 않은가)


얼마 뒤 공항의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뮌헨으로 향하는 루프트한자 항공기가 보였다. 왠지 저 비행기를 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비행기 통로로 발을 들이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내가 생각한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혼자 해외를 가는 일은 처음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아프기까지 하니 도저히 여행을 해낼 자신이 없었다. 며칠을 골골대다 스위스 어느 병원에 가 있을 것만 같았다.

일단 가보기로 하다

게이트에서 탑승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텅 빈 의자에 앉아 비행기로 연결되는 유리통로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냥 가보기로 했다. 그냥 한번 부딪혀보기로. 가지 말아야 할 길로 걸어들어가는—물살을 거스르는 듯한—기분이었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비행기 내부의 좁은 통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자 객실 안은 분주함으로 북적였다. 자리마다 놓인 보라색 담요와 흰 쿠션 위로 널브러져 있는 안전벨트. 캐비넷에 머리를 넣어 캐리어를 끝까지 밀어 넣는 사람들.


탑승을 늦게 한 탓인지, 느낌 상 이륙까지는 금방이었다. 잠시 뒤, 복도를 따라 스튜어디스가 캐비넷을 닫으며 걸어왔고, 그에 맞춰 안전벨트의 철컥이는 소리가 기내가 울려퍼졌다.


(기장이 안내방송을 한다.)


안내 방송이 끝나고 머리 위 안전벨트 표시 등이 점등되자, 비행기는 서서히 낮은 엔진음을 내며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중력이 나를 힘껏 눌렀고, 창 밖으로는 오후의 광경들이 비틀비틀 구부러졌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비행기가 무사히 뮌헨공항에 도착하고, 나는 혼자 경유를 해보는 것이 처음이라 정신을 바짝 차릴 수밖에 없었다. 확신이 없었던 나는 전광판에 뜬 환승 게이트를 몇번이고 확인해가며 표지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입국 심사장을 거쳐 탑승 게이트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게이트가 중간에 바뀌진 않을까 불안해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새벽잠에 취해 꾸벅 졸면서 탑승시간을 기다렸다. 어둑한 타지의 공항에서 이렇게 혼자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니, 낯선 감정들이 묘하게 뒤섞이며 낭만감을 자아냈다.


비행기 안, 좁은 통로를 따라 줄지어 들어가는 사람들.

취리히행 비행기는 좌석이 한 줄에 4개밖에 없었다. 비행기보다는 버스(Air Bus)를 타는 느낌이었다. 50여분의 짧은 비행을 앞두고, 스위스 항공의 스튜어디스들은 승객들에게 초콜릿을 하나씩 건네며 걸어왔다.


어둑한 밤하늘을 향해 비행기가 날아오르고, 비행기 창가 너머로 뮌헨의 야경이 기울어진다.

도착해버렸다

아직 공항 바닥이지만 취리히의 땅을 밟는다. 내가 혼자 스위스에 오다니. 졸린 눈을 부비며 수하물 수취장에 도착하자, 분홍색 네임택이 달린 나의 은빛 캐리어가 검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내게 오고 있었다. 캐리어는 나의 유일한 계획이었다. 나에게는 이주일간 모든 교통수단을 탈 수 있는 스위스패스 한 장과 일곱 곳의 숙소, 귀국행 비행기 티켓 한 장이 전부였다.

스위스패스

스위스의 밤공기는 다소 차가웠다. 첫날 숙소로 예약해 둔 캡슐호텔은 공항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길치인 나에게 연결통로를 찾아내는 일은 무리였다. 나는 한참을 돌아 어렵게 호텔을 찾아냈고, 늦은 밤이라 직원이 없어서 온라인 체크인을 해야 했다. 내가 배정받은 방은 720번 캡슐, 고층에 있는 캡슐이어서 사다리로 올라가고 내려가는 데에 애를 많이 먹었다.

취리히 캡슐호텔

샤워실 안, 부연 수증기 속에 물소리가 잔잔히 울려퍼진다. 장시간 비행으로 떡진 머리를 샴푸로 씻어내고, 따뜻한 물로 몸을 녹여내니 피로도 같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샤워실을 나오는 나, 몰려오는 노곤함에 눈을 깜빡거리며 캡슐이 늘어선 방으로 향한다. 비행기에서 한숨도 못 잤던 탓에 아직 아픈 기색이 역력하다.


나는 어서 잠에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층 사다리에 발을 올리려는 순간, 내 슬리퍼가 사라져 있었다.


나는 맨발로 운동화를 구겨 신고 라운지로 걸어나와 슬리퍼를 찾기 시작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발을 훑어보며 두리번대고 있자니 사람들 눈에 퍽 이상하게도 보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하며 로비를 돌아다니다 낯선 발에 끼워진 내 슬리퍼가 까딱거리며 눈에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한쪽 구석 소파에서 아래 캡슐에 묵는 남자가 내 슬리퍼를 신고 통화를 하고 있었다.


슬리퍼를 찾아 돌아오는 길, 이번에는 민머리의 동성애자를 만났다. 그 남자는 나를 보더니 윙크를 해보이며 나랑 같이 자자며 나를 따라다녔다. 그 이후에도 여섯 번을 더 마주쳤다. 화장실을 갈 때마다, 라운지로 나올 때마다 그 남자를 마주쳤다. 남자는 나를 볼 때마다 말을 걸며 나를 따라왔고, 나는 한숨을 삼키며 피해 다니기 바빴다. 여행의 시작이 이렇게 짓궂다니, 하는 생각에 침울함이 차올랐다.


캡슐에서는 한 시간도 채 잠에 들지 못했다. 잠에 들기엔 배가 너무 고팠고, 뭘 먹기엔 속이 너무 안 좋았다. 몸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내 슬리퍼는 자꾸 사라졌다.


‘혼자 너무 멀리까지 왔나?’


이때만 해도 나는 스위스에 온 것을 후회했다.

새벽 6시, 맥도날드에서 맥머핀을 겨우 구겨 넣으며 외로운 식사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