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의 루체른

겨울왕국에 도착하다

by 찬희

텅 빈 철로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크기의 숨을 하얗게 내뱉는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얼굴을 벌겋게 스치면, 볼에는 추위의 자국이 남는다. 나는 고개를 돌려 기차의 머리를 기다렸다. 어느새 기차가 선로를 따라 미끄러져 들어왔고, 열차의 마찰음이 바람과 섞여 불어오기 시작했다.

겨울 기차를 기다리며

기차는 속도를 줄이며 서서히 멈췄지만, 문은 스스로 열리지 않았다. 스위스의 기차는 승객이 먼저 내리지 않는 한 문이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 나는 커다란 열림 버튼을 무겁게 눌러 문을 열었다. 비로소 여행이 시작된 것이었다.


털썩, 의자에 몸을 싣고 등받이에 머리를 한껏 기댄다. 기차가 역사를 벗어나기 시작하자 창 밖으로 흰 눈이 차분히 내려앉은 철길이 지나가고 있었다. 낮게 속삭이는 기차의 백색소음과 눈이 함박 내린 스위스의 겨울 풍경은 어제의 후회를 천천히 지워가고 있었고, 이때 비로소 출발자의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


오전 9시 50분, 루체른 역에 기차가 멈춰 서고 나는 누가 봐도 이방인처럼 역사를 두리번거리며 출구를 찾아 걸어 나갔다. 중앙역 바로 앞에는 거대한 아치형의 석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토르보겐 루체른'으로 불리는 이 석문은 1971년 화재로 다 타버린 루체른 중앙역의 유일한 잔해였다. 홀로 그간의 낡은 시간을 기어이 다 담아내고 있는 듯했다.


오래된 석문을 지나자마자 하얗게 물들여진 로이스 강가가 한눈에 들어왔다. 『나니아 연대기』에서 루시가 옷장을 열고 들어가 마주한 아름다운 설국을 보는 듯했다. 방금 지나간 석문이 내게는 나니아로 통하는 『나니아 연대기』 속 옷장이었다.


여기는 겨울왕국임이 틀림없었다. 소설 속의 세계를 비로소 현실에서 마주하자 나는 얼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뭇가지에 두텁게 쌓인 눈더미들, 고요하게도 눈이 내린 한겨울의 카펠교, 저 멀리 보이는 설산과 새햐얗게 눈꽃이 서린 숲. 온 세상이 흑백이었다.

카펠교

내가 이곳을 미리 알아보고 왔더라면 아마도 충격이 덜했을 것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여행'은 되려 여행의 우연성을 극대화시켜 예기치 못한 황홀함을 준다. 체크인을 하러 호스텔로 가는 길 내내 루체른의 풍경들은 자꾸 내 발목을 잡았다.


루체른에서 묵을 숙소는 1800년대의 감옥을 개조한 호스텔이었다. 음산한 분위기와 죄수들의 비명을 상상하며 호텔을 들어갔지만, 호텔 내부는 생각보다 깔끔했고, 무엇보다 호스텔 주인이 아주 친절했다. 나선형의 좁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보이는 객실로 통하는 문은 낡은 감옥문을 그대로 사용한 듯했다. 복도 끝에는 쇠창살이 보였고, 죄수들이 열었던 짙은 색의 나무문을 열면 새까만 철제 침대가 이층으로 놓여있었다.


방 안에는 동양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휴대폰을 보며 누워있었다. 영어로 국적을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코리아. 나는 머쓱하게 한국어로 인사를 나누고 침대 옆에 간단히 짐을 풀었다. 감방 안에는 6개의 침대가 있었지만 그중 4개의 침대가 비어있었다. 유일한 감방 동료였던 그 한국인 남자마저도 내일 아침 폴란드로 떠난다고 하는 바람에, 내일은 운 좋게 독방에 수감되어버릴 예정이다.


우선 허기를 채우러 루체른 역 내에 있는 마트로 향했다. 역 입구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깊이 내려가면 MIGROS라는 간판을 발견할 수 있다. 마트에 들어서자 잔뜩 쌓여진 빵더미 앞에서 사람들이 빵을 손으로 집어 봉투에 담아내고 있었다. 파리바게트에 있는 플라스틱 집게 따위는 없었다.


나는 점심으로 차가운 초코 도넛 하나와,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크루아상 하나를 샀다. 그리고 계산대에서 독일어가 잔뜩 적힌 회색빛 영수증을 받아들었는데, 영수증 디자인이 신기해서—여행을 가면 정말 별게 다 신기하다—버리지 않고 고이 접어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나는 먼저 차가운 초코 도넛을 한 입 베어물었다. 속이 안 좋아 뭘 먹지를 못했지만, 달콤한 초코 도넛은 다행히도 잘 넘어갔다.


루체른 역 앞 선착장에는 유람선에 꽂힌 스위스 깃발이 설국을 배경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눈부신 겨울 앞에서 나는 카메라를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로이스 강을 가로지르는 Seebrücke 다리를 건너자 강 반대편에는 바오밥스러운 이국적인 나무가 줄지어 서있었다. 나는 두꺼운 나뭇가지를 따라 피어난 상고대를 바라보며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자연만큼 재미있는 게 없는 것 같다던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오른 나는 눈을 반짝이며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빈 사의 사자상 근처에는 눈꽃이 한참 서려있는 나무가 빨간 벤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돌바닥 사이에는 하얀 눈이 끼어있었고, 사람들이 눈 밟는 소리가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눈송이가 차분히 떨어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거대한 암석 한가운데 사자 한 마리가 움푹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석문을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에 비유했다면, 사자상은 아슬란에 가까웠다. '최후를 맞이하는 사자의 모습을 바위에 새긴 추모비로, 1792년 튀일리 전쟁 영웅을 기립니다.' 구글맵에 빈 사의 사자상을 검색하면 나오는 내용이다. 이렇게 추모의 내용마저 소설 속 아슬란의 고귀한 희생을 떠올리게 하는, 루체른은 기묘하게 나니아 왕국과 닮아있었다.

빈 사의 사자상


이전 01화준비되지 않은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