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의 설경

여행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by 찬희

01

빈 사의 사자상을 보고 로이스 강가로 다시 돌아가려는 그때, 어떤 하얀 중형차가 나를 부르며 차를 멈춰 세웠다. 차 안에는 이태리 남자 두 명이 타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차 안에 앉아 내게 말을 건넸다.


"취리히 공항으로 가는 길을 몰라서 그런데, 구글맵 좀 보여주실 수 있나요?"


나는 조금 수상쩍은 마음에 휴대폰을 꽉 쥔 채 취리히 공항으로 가는 지도 경로를 보여줬다. 이태리 남자는 내 휴대폰 화면을 찍더니 고맙다며 내 이름을 물었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본인이 이태리에서 일하는 패션 디자이너라며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자기 와이프도 한국 사람이라며, 부산에 살고 있다며 신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조수석에 앉은 남자는 말이 없었다. 패션 디자이너라고 주장하는 그 남자는 별안간 내 옷 사이즈를 물었다. 그러고는 내게 명품 브랜드 의류의 사진들을 스크롤하며 보여줬다.


"발렌시아가, 구찌, 샤넬... 뭐 어떤 걸 원해요?"


남자는 원하는 옷 한 벌을 선물로 준다며 나의 집 주소를 물었다. 나는 애써 웃어 보이며 완곡하게 거절했고, 그러자 남자는 이내 아쉬운 표정을 보이며 내게 악수를 요청했다. 분명히 뭔가 있을 것 같았다. 소매치기? 납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뻔히 두 사람 다 휴대폰이 있는데 구글맵은 왜 없는 거며, 다짜고짜 명품 옷 하나를 선물로 준다니.


악수를 할 때도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여기서 내 손을 확 잡아끌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정말 악수만 하고 헤어졌다. 이태리 남자 두 명이 탄 중형차가 자리를 떠나고, 나는 한참을 서서 내 주머니를 뒤졌다. 여권, 휴대폰, 지갑. 전부 제자리에 있었다. 나는 한동안 의아함에 빠져 아까의 장면을 계속 되돌리며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냥 옷이 주고 싶었던 걸까.


02

다시 로이스 강가, 눈송이가 홀씨처럼 나부낀다. 흰 하늘 아래 온통 겨울로 물들어진 마을. 흰 지붕을 덮어쓴 북유럽 풍의 건물들과, 그 뒤로 하얗게 물들어진 흑백의 숲.


강이 은빛이다.

어떻게 저렇게나 은빛일 수가 있지, 하며 어느 문학 작품에서나 보았던 비유들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몸소 깨우친다. 아,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강물결이 정말 은비늘처럼 보이는구나, 하며.

아직도 루체른의 로이스 강가를 걷던 기억이 선연히 남아있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겨울의 이상에 가까워서였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도 확실히 나에 대해 느끼는 것이 있었다.


나는 여행을 해야하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느낌표처럼 떠올랐다. 흑백의 설경을 마구 누비고 다니면서, 나는 여행자로서 엄청난 자유를 느꼈다. 여행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여행을 '해야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겠냐마는, 어쨌거나 그때 느낀 자유로운 감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그토록 꿈틀거린 적이 없었는데.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을 밟는 나, 뽀드득—하는 소리가 허공에 울려퍼진다.


03

신난 걸음이 조금 지나쳤는지 다리에 무리가 가기 시작했다. 어디 앉을만한 곳을 찾으러 카페를 잠깐 가려고도 했으나, 그러기엔 물가가 너무 비쌌다. 나는 카페 대신 루체른 역에 정차해 있던 아무 기차에 올라탔다. 생각해보니 언제 어디에서나 앉을 수 있는 곳, 기차가 있었다. 스위스패스 덕에 아무 기차나 타고 어디로든 갈 수 있었지만, 어딜 가고 싶었다기보다는 그냥 앉아있을 곳이 필요했다.


기차 안, 4인석을 홀로 차지하고 앉아있는 나. 차창 밖을 조용히 바라본다.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열차는 어딘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겨울 오후라 그런지 객차 안은 한적했다. 기차가 달리는 동안 나는 유리에 밝게 비친 차가운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왼쪽 좌석에 앉은 금발의 외국인은 신문지를 넓게 펴고 이맛살을 조금 찌푸리고 있었다. 기차는 속도를 내며 승객들의 귀를 먹먹하게 하기 시작했고,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 한 권과 펜 한 자루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출발한 지 40분 즈음, 기차는 올텐이라는 역에 잠시 멈춰 섰다. 나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기차에서 내려 마을을 구경해 보기로 하며 낯선 역사에 발을 디뎠다. 『유라시아 횡단 기행』을 쓴 폴 서루는 '기차 안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다. 심지어 내리려는 충동조차도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항상 목적지가 미리 정해진 기차 여행만 하다가, 이런 '내리려는 충동'을 실행에 옮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역사 밖으로 나와 마을로 조금씩 걸어들어갔다. 여행객으로 보이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올텐에 대해 무지했던 나는 무얼 해야 하나 방황만 하다 왔지만, 동시에 어떤 기대감도 없었기에 상관없는 일이었다. 여행을 하기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지루한 일상—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소회지만—이었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지루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올텐의 일상은 루체른에 비하면 시간이 멈춘 것처럼 유난히 고요했다.

올텐의 지루함

적어도 현실은 소설처럼 즉흥에 따른 결과가 매번 극적이진 않다. 올텐의 지루함에 대해 떠올리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04

다시 루체른, 저녁을 먹기 전 숙소 근처의 무제크 성벽을 따라 산책을 한다. 해 질 녘 푸르스름해진 눈길을 따라 올라가면, 개를 산책시키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 눈썰매에 앉아 하얀 내리막을 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무제크 성벽

나는 이방인의 눈으로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더군다나 혼자로서의 시선은, 고독의 익명성 속에서 조금 더 투명하게 관찰해내게 한다. 폴 서루가 『낡은 파타고니아 특급』에서 말했듯이.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으면 사물을 분명히 보고 똑바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다소 진부하더라도 특별하고 흥미로운 비전을 포착하기 위한 고독의 투명함이다."


이곳을 잠시 묵었다 가는 사람들인건지, 이곳에 사는 사람인지는 분간하기 어렵지만, 사람들은 어찌됐든 행복해 보였다. 아이들끼리 눈싸움을 하고, 걱정스럽지만 동시에 흐뭇한 미소로 그들을 지켜보는 엄마들이며, 눈길을 산책하는 노부부며. 나도 나의 가족이 생각났다. 가족만큼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것이 있을까.

해질 무렵의 루체른

05

루체른 2일 차, 리기산과 필라투스를 가보려던 어젯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어떤 이유에선가 몸이 다시 안 좋아지는 바람에, 나는 온종일 숙소의 철제 침대에 누워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혼자 여행을 떠나 앓아 누워보면 알겠지만, 외로움이 꽤 서럽게 밀려온다. 나를 챙겨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어둑한 저녁이 찾아오기 전, 하루를 이렇게 버리는 것이 아까워 베른까지 가는 기차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침대에 계속 누워있을 바에 기차를 타고 앉아있기라도 하자, 는 일종의 과욕이었지만 막상 수도인 베른에 도착하니 장미공원만이라도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역에서 내리자마자 궂은 비가 쏟아졌다. 겨울의 찬 비가 매서웠던 탓에, 장미공원은 커녕 10분도 베른을 구경해보지 못한 나는 다시 기차를 타고 루체른으로 금방 돌아왔다. 결국 마지막으로 루체른의 야경을 보러 간 것이 여행의 전부였던 하루였지만, 왜인지 모르게 타지에서 아팠던 이 날의 기억이 가끔 이름 모를 향수를 자아낼 때가 있다.

저녁의 카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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