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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halo Oct 13. 2021

스무 번째 날.

끝없이 이글거리던 땅, 스페인

A said : 

 

7.12 Girona PM 21 : 02


 밤에도 더위가 계속되어 꽤나 뒤척인 데다 아침마다 찾아오는 근육통에 오늘 아침도 밍기적댄다. 오랜만에 국경을 넘는다는 뿌듯함과 그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산을 넘어야 한다는 걱정, 복잡 미묘한 두 감정이 아침부터 괴롭힌다. 어쨌든 나아가야 함은 자명한 사실임을 깨닫고 가방끈을 질끈 묶는다. 오늘도 역시나 T형을 앞세워 출발한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떠나는 마을을 두 눈에 담는다고 한눈을 팔다 눈앞에 가던 T형을 시야에서 잃어버린다. 아무리 골목길이 복잡하다지만 바로 눈앞에서 달리던 동행을 잃어버린 사실이 너무 기가 차서 한참 동안이나 주변을 돌아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숙소 앞에도 가보고 왔던 길을 다시 훑어보지만 꽁무니도 찾을 수 없다. 전화기로 연락을 시도하지만 이어질 듯 말 듯한 연결 때문에 서로의 위치 파악이 힘들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연락의 부재가 황당하지만 어쩌랴, 둘 다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을. 아침부터 땀이 뚝뚝 떨어지는 햇빛 아래 같은 거리를 몇 번을 돈 끝에 그저 갈 길을 가기로 마음먹는다. 항상 앞에 있던 T형이었으니 가다 보면 있을 거라 지레짐작한다. 시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마을의 웬만한 길 위로는 다 바퀴를 굴려 본 듯하다. 한없이 치솟은 불쾌지수 덕에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짜증을 부린다. 어차피 저 높은 산을 거쳐 스페인으로 통하는 길은 하나뿐이다. 비슷하게 대책 없이 무던한 성격인 T형의 성격을 대충 알던 터라 길을 가다 보면 어디서든 만나겠지 하고 출발한다. 


 한동안 자전거를 타다 보니 슬슬 도로에 차들이 많아진다. 마을을 출발할 때는 한적하던 시골길이 곧 차들로 가득 찬다. 길가에 보이는 간이식당이나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을 파는 가게들의 모습이 날 좋은 주말에 교외로 나가볼까 하는 길에 흔히 볼 수 있는 휴게소나 기념품점들을 보는 기분이다. 지나다니는 차들의 번호판을 보니 대부분 한여름의 태양을 즐기러 이국으로 건너가려는 듯한 프랑스인들이다. 넓지 않은 산길에 주차장처럼 가득 차 있는 자동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자동차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 같이 즐겁다. 찻길이라 경사가 심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계속되는 오르막에서 열심히 페달을 밟는 이방인에게 휘파람이며 손짓이며 받는 사람이 머쓱할 정도로 격려가 쏟아진다. 이런저런 먹을거리를 창 밖으로 내밀지만 페달 밟는데도 모자라는 힘 때문에 호의를 받지 못함이 미안해진다. 고마운 호의들을 뒤로하고 길 위에 서 있는 자동차들을 앞질러 산길을 오르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


 한참을 올랐을까, 저 앞에 자리 잡힌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국경을 끼고 있는 마을인 듯하다. 드디어 오르막이 끝나고 내리막을 향한 평탄한 길이 나온다. 지나가던 바닥 어딘가에 이 곳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이라는 동판이 붙어 있다. 두 나라의 국기도 곳곳에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을 보니 정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건물들 혹은 붙어 있는 간판에도 알아볼 수 없는 스페인어들이 점점 많아진다. 휴가철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렇게 많은 차들과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을 이리도 좁게 만든 누군가가 참 원망스럽다. 불만에 가득 찬 누구와는 달리 길거리의 표정들은 대부분 너무나 즐겁다. 방향이 어느 쪽이든 타국으로 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설레는 모양이다. 이전에 겪었던 국경에서의 무미건조한 모습과는 달리 즐거운 국경의 모습을 보고 덩달아 신이 난다. 


 역시나는 역시나다. 이제 슬슬 내리막이 나온다 싶더니 눈 앞에 익숙한 자전거의 자태가 보인다. T형이 길 한 켠에 자전거를 세워 두고 앉아 있다.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다행이다 싶어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는 속내와는 달리 아무렇지 않은 듯 옆에 가서 앉는다. T형 역시 아무렇지 않게 왔냐며 마시고 있던 콜라 한 병을 건넨다. 별 말없이 둘은 앉아서 지도 위에는 줄이 그어져 있을, 땅 위에는 검문소가 있는 그곳을 바라본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땅임을 표시하는 여러 가지 표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너무 나 즐거워 보이는 표정들을 보면서 왠지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스스로도 자전거 여행 중임을 깨닫는다. 소박하고도 맥없는 이 깨달음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굳이 흔적을 남겨야겠다 라는 생각보다는 그저 눈앞의 광경이 신기해 걸어가 만져보고 가까이서 바라본다. 역시나 이 땅을 지나는 인간 중 한 명인지라 간단히 흔적을 남긴 채 다시 여정을 시작한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경계선을 보았다는 사실보다 그제야 시작된 한없이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보고 더욱 큰 기쁨을 느끼는 처지가 가련하다.

 끝나지 않을 듯 바닥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스페인어들이 보인다. 또 다른 선 하나를 건너온 만큼 새로이 즐거운 마음으로 페달을 굴리고 싶었지만 길을 잘못 들었는지 차들이 한참 쌩쌩 달리는 도로 옆에서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다.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의 바퀴에서 일어나는 흙먼지를 한참 쫓다 조그만 간이매점이 붙어 있는 주유소에서 쉬어간다. 간단히 요기를 하려고 자리를 잡는다. 말이 통하지 않지만 눈대중과 단련된 몸짓으로 주문을 해낸다. 도중에 납품하는 직원인지 매점에 들어와 주인과 말을 섞는다.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어찌나 빠른지 뜻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지만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를 멍하니 구경을 하는 것도 흥미롭다. 빠르게 움찔거리는 두 입술을 하릴없이 바라보다 돌연 이 땅에 도달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더욱 쨍쨍해지는 햇빛을 마주하게 되지만 울창한 숲은 고사하고 돌아볼수록 주변의 풍경은 눈이 탁 트인다. 황량하다면 황량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 허전함 속에서도 나름의 운치는 유지하고 있다. 근래 녹색이 눈을 가득 채워왔다면 이제는 황토색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새로운 광경을 맞이하며 스페인에서 만나게 되는 첫 도시인 Girona로 들어선다. 숙소를 향해 발을 굴리면서 지나가는 도심 한가운데 거대하게 떡 하니 고성이 자리 잡고 있다. 못 보던 모습의 고성에서는 긴 창을 꼬나 잡은 기사가 말을 타고 달려 나올 것만 같다. 그런 멋진 성 앞에서도 지친 몸 덕에 차마 가까이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멀리서나마 짧은 감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숙소를 향해 달린다. 


P.S.1 도심을 거닐면서 접한 거리의 사람들의 옷차림이 꽤나 훤칠하다. 막상 ‘패션’하면 떠오르는 나라인 프랑스를 지나면서도 그렇게 실감하지 못했는데, 스페인에 와서 보니 척 봐도 시원시원하게 차림새를 한 그들의 꾸밈새가 까막눈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바뀐 땅에서도 통신 수단을 사용해야 했기에 근처의 상점에 들른다. 상점에 들어가서 직원과 이야기를 나눈다. 점원의 콧등 끝자락에 겨우 걸쳐진 안경에서 쏘아지는 시선이 조금 따갑다. 따가운 시선에 스스로의 몸가짐을 돌아보니 조금 부끄럽긴 하다. 옷차림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여정이었지만 차림새가 영 꼴이 아니긴 하다. 그와 대조되게 시선을 쏘아대던 장본인은 기분이 더욱 쓰리게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다. 손님임에도 불구하고 괜히 죄스러운 마음으로 설명을 듣는다.

T said :

 

DAY 18


Thanks to my 자전거.

나보다 나이를 많이 먹은 자전거가 

별 말썽 없이 견뎌주고 있다. 

평생을 함께한 자전거처럼 내 몸을 편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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