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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halo Oct 13. 2021

스물여섯 번째 날.

끝없이 이글거리던 땅, 스페인

A said : 

 

7.18 Valencia PM 21 : 59


 오늘 달리는 길 역시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들이 지나다니는 도로에 붙어 간다. 대도시와 가까워지는지 차의 양도 많아지고 표지판도 점점 복잡해진다. 좀 더 길을 찾아본다면 덜 황량한 풍경을 보며 달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목적지까지의 힘 빠지게 하는 거리는 단연 그런 고민을 제치고 고속도로로 이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안장 위에서의 무의식 상태가 다시 발동된다. 들판이니 산이니 시원한 푸른색이 시야를 격려해주던 프랑스와는 달리 이 곳에서는 스스로가 공장에서나 있을 법한 기나긴 회색 레일 위에 실려가는 짐짝처럼 느껴진다. 숨막히는 더위 때문에 눈앞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들이 저 하늘 높은 곳 어딘가로 이끄는 손짓처럼 보인다. 


 페달을 밟기 시작한 지도 시간이 꽤 지났고 끼니때가 되었지만 거리에 변변한 식당 하나 찾기가 힘들다. 배가 고파오고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서야 자전거를 멈춘다. restaurant와 비슷한 단어가 붙어있는 간판을 보고 대충 식당이겠구나 싶어 멈춘 곳은 한국에서도 길가에 가끔 보이는 기사식당 느낌을 물씬 풍긴다. 찬장에 가득 늘어서 있는 각양각색들의 술병을 보면 식당이라기보다는 술집에 가까운 모습이다. 이곳 사람들이 열광하는 축구팀들의 포스터나 유니폼들이 벽에 걸려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더욱 그렇다. 흔히들 점심을 먹을 시간대에서 기껏 해야 한 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식당 안에는 인기척이 없다. 실례한다고 몇 차례 외친 후에야 귀찮아하는 할아버지 한 분께서 나오신다. 하지만 메뉴판도 없고 할아버지와의 언어소통 역시 불가능. 결국 만국 공통어인 손가락질로 조리대 안에 미리 만들어 놓은 음식들을 이것저것 고른다. 얼마나 방치되어 있었을지 모를 음식들이었기에 불안함이 솔솔 피어올랐지만 입에 넣으니 예상외로 훌륭하다. 육류와 곡물의 조합과 함께 짭짤함이 반가웠던 올리브에 땅콩까지 훌륭한 식사를 한다. 턱을 괴고 TV를 바라보는 주인 할아버지나 가게의 칙칙한 분위기가 실없이 편안해진다. 물 좀 얻을 수 없을까 벌컥벌컥 마시는 시늉을 하자 화장실을 손으로 가리 키는 덕에 수돗물로 물통을 한가득 채우고 다시 길을 나선다. 

 배도 든든히 채웠겠다 하루 열심히 달릴 수 있겠구나 싶었지만 의지박약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그 다짐은 얼마 가지 않아 기운이 다한다. 언제나처럼 역시 T형의 뒤태는 점점 멀어만 진다. 쉬지 않고 페달을 굴리는데도 거리가 벌어지는 모습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닿지 않는 환상을 좇듯 열심히 뒤따라가고 있을 무렵, 어째 자전거가 달리는 모양이 뒤뚱거리는 느낌이 든다. 잠시 멈춰 혹시 바퀴가 터졌나 만져 봤지만 딱딱하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안장에 올랐지만 뒤뚱거림은 점점 더 심해진다. 그때 팅 소리가 나며 뒷바퀴에서 가는 쇠막대들이 튀어나온다. 깜짝 놀라 세워두고 보니 뒷바퀴의 바큇살들 몇 개가 빠져 있다. T형의 타이어가 터진 일은 몇 번 있었어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안이 벙벙하다. 바큇살이 빠진 채로 달리면 안 되나 싶어 손으로 끌고 왔다 갔다 해 보니 그 가는 막대기들이 균형을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똑바로 굴러가지를 못한다. 할 수 없이 빠진 바큇살들을 힘으로라도 억지로 제자리에 끼워 맞추는 데 쉽지가 않다. 각자 맞는 자리를 찾는 것도 힘들고 휘어지지 않게 주의하는 것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얼기설기 다 끼워 맞췄다 싶어 다시 페달을 밟아본다. 얼마 가지 않아 뒤뚱뒤뚱하더니 바큇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또 빠진다. 지긋이 어금니를 물고 다시금 그 과정을 반복해본다. 주저앉아 바큇살을 끼워 맞춰 보지만 도통 얼마 가지를 못한다. 몇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도저히 고치기 힘들겠다는 절망감이 몰려온다. 지도로 보아하니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는 30km 남짓. 끌고 간다면 새벽이나 되어야 도착할 듯싶다. 앞에 가고 있을 T형에게 연락해보니 뒤따라올 동행을 기다리며 어디에 쉬고 있는 모양이다. 자신이 지금 머무르는 마을에 기차역이 있다고 여기까지만 어떻게 오면 기차를 타고 금방 갈 수 있을 것 같단다. 기차역까지는 또다시 10km 남짓. 이런 상황에서는 차도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바퀴를 끌어안고 낑낑대는 데도 꽤 시간을 소비했던 터라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도로변에 서서 최대한 밝은 표정으로 구원의 눈길을 보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맙게도 작은 밴 한대 가 눈 앞에 멈춰 선다. 푸근해 보이는 아저씨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입을 여는데 너무도 빠른 스페인어다. 대충 바퀴를 손가락질하며 마을 이름만 반복해 뱉어내다 보니 아저씨도 그중 아는 말이 나와 기쁜 듯 같이 소리를 지른다. 데려다주는 마을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그 잠깐이나마 서로 손짓 발짓으로 신나는 대화를 이어간다. 일을 하다 잠시 외출을 한 듯 자전거를 다시 내려주고 급하게 다시 차에 오르는 아저씨를 보니 고마움이 더 커진다. 급하게 출발하면서도 경적을 울리고 소리를 지르며 요란하게 작별 인사를 하는 모습에 잠시 피곤을 잊고 낄낄 웃는다.

 오래간만에 다다른 대도시에 발을 내딛자 북적거리는 인파가 영 어색하다. 힘겹던 주행 때문이었을까. 불과 수십 분 전에 봐 오던 풍경과 너무도 다른 회색의 도시 빛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다. 


 섬뜩한 첫인상의 Valencia와는 영 반대의 모습이던 오늘 만날 친구 Antonio가 너덜거리는 빨간 자전거를 보자마자 눈에 화색이 돈다. 기름때 묻히던 일을 업으로 한 적이 있었다는 그는 고장난 자전거를 한 번 살펴보자며 자전거 거치대를 들고 온다. 아파트에 살면서 이런 거치대를 가지고 있다니 Antonio와 자전거 사이의 끈끈한 관계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자신 있어 보이는 그의 표정과 몸짓을 보아하니 금방 고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Antonio와 함께 자전거를 고치는 동안 거실에는 장난치는 그의 아내와 딸의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그런 거실 벽면 한편에는 유럽에서 출발해 인도를 거쳐 중국에 이르는 빨간 선이 그어진 지도가 보인다. Antonio와 그의 아내 Victoria는 자전거 여행 중에 만나 지도의 빨간 선을 따라서 이후의 여정을 죽 함께 했고, 그 와중에 예쁜 딸 Helena도 얻게 되어 이 곳 스페인에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는 소설에나 어울릴 법한 이야기가 그 지도에 담겨있다. 국경 사이를 넘는데도 끙끙대기 일쑤였는데 대륙을 넘나드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내내 헤실헤실 웃는 얼굴인 부부를 볼수록 감이 오지 않는다.

금방 끝날 것 같았던 수리의 매조지가 힘들다. 마지막 남은 바큇살이 꼭 하나씩 말썽이다. 번갈아 가면서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용을 써도 꼭 맞지를 않는다. 하다 못해 용접기까지 등장해 보지만 팔뚝보다 훨씬 가늘고 가는 바큇살은 맘대로 되지 않는다. 금방 끝날 줄 알고 시작했건만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고, 집주인과 민폐객은 기름때가 잔뜩 묻은 손으로 연신 이마의 땀을 훔친다. 바큇살이 엇나갈 때마다 Antonio의 눈치를 보게 되지만 쓸데없이 심통이 나 있는 주인과 달리 고맙게도 그는 그저 피식 웃으며 다시 손을 놀릴 뿐이다. 그의 가벼운 웃음들이 ‘이런 사람도 있구나’ 되려 세상의 깊음을 실감하게 해 준다. 고마운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 Antonio를 위로하려는 건지,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모르는지 괜스레 실없는 입발림들이 내내 멈추지 않는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뒷바퀴는 제자리를 찾았다’와 같은 멋진 마무리는 결국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수명이 다한 바퀴를 어떻게든 살리려던 심폐소생술은 무위로 돌아가고 집 앞의 자전거 가게로 가 본다. 그 곳에서도 어쩔 수 없었던 바퀴의 사망 선고를 듣고, 사이즈가 맞는 바퀴가 없어 다음날 다른 가게를 둘러보기로 하고 빈 손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더 이상 Antonio 가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 홀가분하다.


P.S.1. ‘움직임이 태산 같다.’ Antonio와 짧은 하루를 보내고 나니 무협지나 삼국지 같은 옛 책에서나 나올 법한 이 설명이 떠오른다. 자전거 여행 경험이 이루 셀 수 없었던 그에게서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 신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예상과 다르게 그는 시종일관 매우 진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침묵이나 어두운 분위기와는 또 달랐다. 크게 웃기도 하고 즐겁게 이야기도 나누었지만 항상 본인이 입을 떼기 전에는 신중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 쉽게 내뱉는 말은 듣기 힘들었다. 자전거를 고치며 가볍게 웃을 때도, 저녁을 먹으면서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조언을 할 때에도 상대방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천천히 이야기하는 모습은 그에 대한 신뢰감을 더해주었다. 이 사람이라면 무슨 이야기를 해도 기꺼이 들어주고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을 것만 같았던 그의 눈빛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T said : 

 

DAY 24 


어제 밤새 마음의 결정을 마치고, 오늘 처음으로 자전거를 탔다. 

뒤에 찬희가 있었지만 혼자 타는 것이라 생각하고 예행연습을 했다.


문득 ‘이렇게 혼자 달리다 결국 리스본에 닿게 되면 무슨 느낌일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말도 안 되게 눈물이 고였다. 

가슴이 벅찼다. 웃음도 나왔다


그래,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이라. 

-

찬희 자전거는 참 효자다. 

그동안 아픈 티 하나 안 내고 참다가, 

라이딩 마지막 날 30킬로를 남기고 퍼져 버렸다. 

끝까지 무탈했더라면 좋았을 법도 하지만, 

뭔가 이게 더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덕분에 발렌시아에 안토니오 집에 와서 자전거를 손보게 되었다. 

리어 휠의 스포크가 몇 개 나간 건데, 전직 메카닉이라는 안토니오라면 별일 아닌 일이다.


근데 도구 부족으로 일이 쉽지 않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을 텐데 

어느새 안토니오의 손은 기름때로, 등은 땀으로 가득하다.


저녁 시간도 훌쩍 지나고, 

지켜보는 사람조차 짜증 나는 그런 상황에서, 마지막 스포크가 빠지지 않는다. 

힘으로 빼려고 할 때마다 ‘픽’하고 비켜나간다. 그때마다 안토니오가 ‘피식’ 하고 웃는다.



'피식’이라고 표현했지만 스페인어로 ‘씨발’이라는 말이 있다면 딱 어울릴 그럴 상황이다. 

욕이 나와도 시원찮을 상황에, 자꾸 피식 웃는다. 

그리고 다시 시도한다. 

문득 안토니오 집 거실에 걸린 지도가 다시 보인다. 

부인과 함께 1년간 떠났다는 인도, 중국을 관통하는 자전거 여행의 동선이 그려져 있다.



저런 사람이어서 저런 여행을 떠난 건지 

저런 여행을 다녀와서 저런 사람이 된 건진 모르겠지만,

조금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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