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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halo Oct 14. 2021

서른두 번째 날.

다다른 그 땅, 포르투갈

A said : 

 

7.24 Lisbon PM 19 : 38


 눈을 뜬 시간보다 감은 시간이 더 긴 하루를 보내고 일어난 아침은 모처럼 상쾌하다. 환대의 기억을 가진 이 곳에서 더 머물 수가 없던 터라 아쉬운 마음에 미적미적 아침을 해결하고 길을 나선다. 이 시대의 건물들이 가득하던 숙소 근처를 지나 옛 도심으로 점점 가까워질수록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스르는 기분이다. 평탄하던 아스팔트 길 대신 우둘투둘 타일이 깔린 오래된 길이 안장 위의 엉덩이를 콕콕 찌른다. 눈에 보이는 건물들이 하나같이 몇 세기 전의 건물들이다. 그 안에는 21세기의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여전히 옛 영광을 뽐내는 건물들의 겉모습에서는 마드리드와는 또 다른 화려함이 느껴진다. 자동차들도 덜컹거리며 지나다니는 길을 자전거로 계속 달렸다가는 자칫 혀를 깨물까 괜한 걱정도 들고 해서 자전거를 안내소에 맡겨두고 두 발로 걷는다. 내내 자전거에 묶고 다니던 가방을 어깨에 메고 땅에 닿는 두 발이 영 어색하다. 


 계속 걷다 보니 바닷가가 보이고 이 대륙의 서쪽 끝에 다다른다. 과연 여정의 끝에 다다르면 어떤 느낌일까. 고단하던 여정의 피로를 마주할 때마다 가장 구실 좋은 버팀목이었던 머릿속의 작은 단편 하나가 그렇게 떠오른다. 계단에 주저앉아 부서지는 햇빛을 비추는 바다를 마주하지만 예상했던 벅찬 감동의 물결 대신 그저 발아래 부딪히는 파도 소리뿐이다. 끝까지 안장 위에 있지 못해서인지, 줄곧 함께 하던 T형이 없어서인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바다를 보아도 특별한 생각이나 감동보다는 그저 이 곳에 왔구나 하는 위치 확인 정도이다. 


 어떤 생각으로 이 곳에 왔을까. 몇 번의 페달질 끝에 여기까지 왔을까. 별 쓸모없는 생각들만 계속 꼬리를 문다. 한동안 멍하니 있다 보니 그간 길에서 만나온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씩 생각난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시곗바늘이 얼른 지나갔으면 하던 그 힘겨운 시간들에게 면목이 없게도 좋은 사람, 좋은 풍경들만 자꾸 떠오른다. 양으로 따지면 즐겁고 고마운 시간들은 힘겨운 시간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고마운 그들에게 리스본에 도착하면 편지를 쓰겠노라 이야기했던 생각이 떠오른다. 엽서나 사야겠다 싶어 지나온 상점가로 다시 발길을 돌린다.

상점가에서 대충 필요한 장을 보고 점심을 먹은 후 오늘부터 묵기로 한 게스트하우스로 향한다. 안내를 받아 방문을 여니 두 덩치 큰 친구가 웃옷을 벗고 있다.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알몸에 휘둥그렇게 눈이 커진다. 마주치는 눈길에 독일에서 왔다는 Peter가 먼저 악수를 건네고 가나에서 왔다는 Mark가 인사를 한다. 자신들도 방금 숙소에 도착해서 해변에 갈 거라며 같이 가자고 제안한다. 특별히 계획도 없었던 터라 얼떨결에 같이 따라가기로 한다. 옆의 두 친구는 웃통을 헐벗고 다시 옷을 걸치지 않는 것을 보니 그대로 나갈 모양이다. 한 번 벗어볼까 싶지만 작렬하는 햇빛을 상대할 자신감이 도저히 생기지 않아 얼른 편하게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선다.


 해변까지는 거리가 가깝지 않았지만 두 만담꾼 때문에 내내 배를 부여잡고 즐겁게 걷는다. 그 둘도 불과 수십 분 전에 처음 만난 사이라는데 어찌나 쿵짝이 잘 맞는지 입이 쉬질 않는다. 여행 중에도 다른 여행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리 흥미로운 줄 처음 깨닫는다. 걷다가 길가에 지나다니는 트램에 오른다. 한껏 들떠있는 여행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북적하다. 트램 안에서도 한참 배꼽이 빠지게 웃다 보니 창 밖으로 아까 보았던 그 바다가 다시 보인다. 정확히 어떤 정류장에서 내려야 할지 셋 다 알지 못하는 상황이 우습지만 가까워 보이는 해변으로 대충 걸어가면 되겠다 싶어 줄줄이 내리는 관광객들을 따라 내려선다. 얼마 걷지 않아 보이는 해변은 나들이 나온 몇 가족이 보일 뿐 소박한 모습이다. 해가 잘 드는 모래사장에 큰 타월을 깔고 그 위에 편하게 눕는다. 따가운 햇빛을 고스란히 맞이하는 일광욕이 영 껄끄러웠던 적이 많았지만 이 날 만큼은 햇빛이 포근하게 느껴진다. 한동안 잠이 들었는지 옆에서 누군가 흔드는 느낌에 눈을 뜬다. 시간을 확인하니 적당히 낮잠을 잤던 듯하다. 점심 때도 조금 지났고 배나 채우러 가자는 제안에 서둘러 짐을 정리한다. 


 에그타르트로 유명한 리스본에서도 원조 격인 가게가 근처에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향한다. 애매한 시간대였지만 건물을 빙 둘러서 줄이 길게 늘어져 있는 광경에 혀를 내두른다. 혼자 갔었다면 대번에 발길을 돌렸겠지만 함께 간 친구 둘이 당연한 듯 대열에 합류하던 터라 함께 줄을 선다. 기다림 끝에 들어선 가게 안의 모습은 오래된 역사를 대변하듯 눈길이 닿는 그 찰나의 공간 하나하나 각자 사연이 있어 보인다. 다른 시대에 들어온 듯한 건물 안에 많은 사람들이 복작복작 자리에 앉아 모두들 하나 같이 동그란 타르트를 앞에 둔 광경을 보아하니 괜히 웃음만 나온다. 그 사이에 껴서 역시나 타르트와 커피를 주문한다. 아기자기한 장식이 가득한 카페 안에는 커플들 혹은 가족들로 가득하다. 그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덩치도 작지 않은 세 청년이 작은 테이블 주위를 둘러앉아 있는 모습이 영 편하지가 않다. 그 와중에 Mark가 자신의 살갗을 꼬집으며 이야기한다. 

걱정 마, 여기서 우리만 모든 피부 색깔(whole skin colors) 다 가지고 있어. 자랑스러워해.

 그 말이 더 웃겨서 킬킬댄다. 금방 나온 따끈한 타르트는 소문에 걸맞게 맛이 있다. 너무 달지 않아 더욱 맛있는 타르트를 게걸스럽게 해치우며 눈에서 하트가 가득하던 테이블들 사이에서 꽤 오래 버틴다.

P.S.1 ‘가나’에서 온 사람을 만난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각자 소개를 하면서 생소한 ‘아프리카’적(?)인 이름을 듣기를 잔뜩 기대했지만 의외로 평범한 이름인 Mark의 소개를 듣고 혼자 괜히 실망을 한다. 영문 모를 실망의 눈빛에 Mark 역시 눈빛으로 ‘왜?’라고 물어온다. 거기다 대고 ‘진짜 이름이 Mark야?’라고 황당무계한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 ‘응, 내 이름 맞아.’라고 당황하는 그를 보자 그제야 혼자만의 공상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린다. 


P.S.2 한낮의 바깥나들이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 이후의 기록은 없었다.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서 빈둥대며 그 날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와중에 룸메이트 둘이 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게스트하우스 1층에는 각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가득했고 그 숫자만큼 즐겁게 이야기할 사연이 가득했다. 그들 손에 이끌려 방에서 나간 이후로는 초저녁부터 연이은 알코올 세례로 점철된 저녁을 보내느라 다시 방에 돌아왔을 때는 즐거웠던 시간을 기록할 마음과 몸 모두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T said : 

 

DAY 30

-

엄청 외롭다. 

하루에 말할 사람이 호텔 리셉션 직원 말고 아무도 없다. 

자전거 탈 때 보이는 건 사람 얼굴이 아니라 자동차 꽁무니뿐이다.


가끔 조그마한 마을이라도 지날 때면 신이 난다. 

페달에 힘이 붙고 사람들을 쳐다보게 되고 나를 쳐다보는 그들이 고맙다.


조금만 더 가면 호텔이 아니라 호스텔에 묵게 된다. 너무 좋다!


웃는 연습을 하고 있다. 

사람의 표정이나 주름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을 알 수 있다.

자전거를 타는 내 상태를 표정으로 표현하자면 찡그림이다. 

하루에 절반 동안 찡그리고 있으면 얼마나 못생기고 인상이 험해질까.


그래서 이 생각이 날 때마다, 힘들 때마다 더 웃으려고 한다. 

활짝. 여행이 끝날 때쯤 내게 예쁜 주름이 생겼으면 좋겠다.

내가 많이 늙었을 때 

예쁜 주름이 이번 여행을 말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기분이 분단위로 왔다 갔다 한다. 원래 그런 건지, 

내가 나를 깊숙이 바라보기 시작한 건지, 

자전거 위에서 명상을 하는 것만 같다. 

다만 조금은 정신병에 걸린 것 같은 상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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