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걷는 아이

<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문학동네, 2025를 읽고

by 나는나

"I can buy myself flower ~" 마일리 사이러스의 노래 'flowers'가 핸드폰에서 흘러나온다. 매일 아침 영어공부를 위해 8시면 자동으로 켜지게끔 EBS앱을 설정해 놓았다. 오늘따라 이 노래의 가사가 가슴을 파고든다.


대학을 졸업하고, 진로를 정하지 못해 헤매던 시절이 있었다. 다른 동기들처럼 공무원 시험을 쳐볼까, 대학원을 진학할까, 마음이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어디론가 계속 떠다녔다. 그 시절 나는 무엇에도 자신감이 없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하기를 원하는가 보다 내가 무슨 일을 할 수나 있을까 의문스러웠다. 학과 사무실 게시판에 붙은 인턴사원 모집 공고를 보고 무역회사에 지원해 보았다. 지원자가 없었는지 바로 채용이 되었다. 인턴기간 6개월이 지나자 정식채용을 하지 않아 그만두었다. 이후에는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 교사로 1년간 근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뚜렷한 경력이 없다는 것에 자격지심을 느꼈다.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얼마간 온라인 학습 관련 회사를 다녔다. 이후엔 과외, 전화영어, 학원 강사 일을 했다. 고3 때 담임이 독어독문학과에 지원하려는 내게 거기 나와서 무얼 하려고 그러느냐고 물었다. 나는 학원 강사라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대답했던 것이 기억난다. 결국 학원 강사가 되지 않았나. 꿈꾸던 삶은 아니었지만, 예상했던 삶이었다.


인생이 원래 꿈꾸던 대로 되지 않는다 말들 하기에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남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여겼다. 무언가를 애타게 갈망하고 노력을 쏟아부어본 적도 사실 없지 않은가. 무던하고 모나지 않은 사람을 만나 늦게 결혼을 했고, 이듬해에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별 탈 없이 자라 주었다. 생활이 안정이 되자 미래에 대한 불안도, 들끓었던 욕망도, 아등바등하던 마음도 잦아들었다. 필부필부. 나의 삶이 간단히 정리된다.


나라는 사람이 태어나 살아온 삶. 한 번뿐인 삶이라고 했던가. 돌아보면 아쉽고, 안타깝고, 후회스러운 시간들이 많다. 책장 구석진 곳에 먼지를 안고 있는 앨범을 꺼내본다. 오래된 나의 돌 사진을 들여다본다. 어딘지 내가 생각한 이미지와 다르다. 짐작컨대 낯선 사진관에서 엄마와 따로 떨어져 촬영용 의자에 앉아 있는 상황이 적잖이 당황스러웠나 보다. 울음이 터지기 직전인 그 아이가 어쩐지 안쓰럽다.


어릴 적 반복해서 꾸던 꿈. 혼자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상상 속 친구와 대화하며 놀던 시간들. 엄마 화장대 앞에서 화장품들로 혼자 하던 인형놀이. 초등부 미사 때 신부님이 들려주시던 이야기들. 대학생이 된 언니가 화장하는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중학생의 나. 하루가 저물도록 음악에 심취해 있던 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 방황하던 대학시절. 그런 내게 빛이 되어주었던 내 친구. 내 친구.


내 친구 S의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그녀는 나와 같은 과 동기이다. 어릴 적 신부님이 언젠가는 예수가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그 모습이 친구의 모습일지, 거지의 모습일지, 어떤 모습으로 오실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예수님을 대하듯 하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그녀에게 예수처럼 보인다고 말하자, “그건 네 안에 예수와 같은 모습이 있어서 일거야.”라고 말했다. 만나는 모든 이에게 따뜻하기만 하던 그녀를 만나기 위해 나는 어학연수를 핑계로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캐나다에는 S가 있었다. 밴쿠버 시내에서 영어학원을 다니는 동안 시골에 사는 그녀를 만나 함께 명상을 했다. 어느 날 S가 내게 '거꾸로 걸어 다니는 아이'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어릴 적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거꾸로 걷는 상상 속 아이와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 아이는 천장을 바닥처럼 걸어 다녔고, 나는 덕분에 천장의 다채로움을 알게 되었다.


S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문득 거꾸로 걷는 그 아이가 ‘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원래 거꾸로 걷는 사람인데, 여태 똑바로 걷기 위해 무척 애를 쓰며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 속에 속하고 싶어 무던히도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다. 누구라도 내게 '참 똑바로 잘 걸으시네요.'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서글퍼져 내가 지금 똑바로 걷는 게 맞나 늘 확인하며 남들의 인정을 갈구했다.


작가 김혜진은 『오직 그녀의 것』에서 고(故) 김이구 선생이 '편집자는 가능하지 않은 일을 하는 자들'(p.274)이며, '편집자라는 존재 자체가 모순'(p.275)이라 했다고 전한다. 가능하지 않은 길을 꿋꿋이 걸어 나가 세상 모두에게 그 길을 내보이는 사람들. 누군가의 인정도 확신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보고 발견한 세계만을 끝까지 바라본 사람들. 작가는 편집자 석주의 이야기를 묵묵하고 담담하게 써 내려간다. 되든 안 되든 읽고 쓰는 일을 계속해나가는 석주는 어쩐지 거꾸로 걷는 내 안의 아이를 떠올리게 하였다.


I can buy myself flowers. 내가 나에게 꽃을 선물할게. 아무도 너를 인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너는 너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렴. 언젠가는 너만의 인생을 완성할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인생과도 다른 오직 너만의 것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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