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빌바오 입성

5.19 주일 비 오후에 그침

by 이프로

Larrabetzu-Lezama-Bilbao 3.53km (레사마-빌바오는 버스 이동)


정말 오늘은 좀 쉬자고 마음먹었었는데 결국 또 배낭을 꾸려서 나왔다.

어제저녁 식사를 하면서 와인을 마시고 그 취기에 잠들었는데 새벽에 목이 말라서 깼다.

목이 부었다.

느낌이 좋지 않다.

아침부터 비가 계속 퍼부어 사람들은 저마다 배낭을 메고 우비를 입고 출격 대기 중인 군인들처럼 알베르게 처마에 서성댔는데 막상 아무도 선뜻 비 오는 거리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몸을 일단 한번 적셨으면 오늘은 그냥 젖은 채로 가야 했다.


이탈리아노 파비안이 먼저 성큼성큼 나섰고 뒤이어 내가 그를 따랐다.

파비안의 걸음걸이와 보폭이 워낙 넓어서 그는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 뒤로는 독일 아가씨 리사가 따라왔는데 어제저녁부터 발의 통증을 얘기하던 터라 속도가 느려져서 그녀도 오래지 않아 내 뒤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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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길의 일요일이라 도로를 따라 걷는 동안 아무도 보질 못했다.

간간히 차가 다니긴 했어도 정말로 비 맞으면서 텅 빈 거리를 혼자 걷자니 좀 처량한 감이 들었다.

집이었다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다녀온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 핑계로 떡볶이나 어묵, 혹은 쫄면, 군만, 파전 같은 걸 사 먹기도 했을 텐데…

첫 마을인 레사마까지 걷다가 마침 문을 연 카페가 있길래 들어와 커피를 마시며 눌러앉았다.


창밖을 보니 이따금씩 어젯밤 같이 알베르게 동기들이 띄엄띄엄 지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사람들이 안 보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부분 비를 피해서 빌바오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몸도 별로 안 좋고 같이 걸을 사람도 없어서 전의를 상실한 나는 카페 주인에게 버스 시간과 정류장 위치를 알아내서 갈등하지 않고 버스를 탔다.

요금은 1유로.


빌바오에 내렸는데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사실 빌바오까지는 버스로 10분쯤 밖에 걸리지 않았다.

걷다가 버스나 택시 교통수단을 타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하면서 살고 있는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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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출퇴근, 또는 통학 시간에 1시간 이상 소요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거리로 치면 하루에 30킬로미터 이상을 이동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30 킬로미터면 하루를 꼬박 걸어야 하는 거리이다. 그런 거리를 지하철로 버스로 자가용으로 이동하여 하루 일과를 하고 또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정부청사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은 서울에서 세종시까지 ktx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니 이동수단의 발달로 시공간의 개념이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인 것이다.

우린 정말 너무들 바쁘게 산다.


빌바오에 왔으니 그 유명하다는 구겐하임에 비를 맞고 걸어왔다.

빌바오 시는 매연 뿜는 공장 지대로 사람들에게서 비호감 도시였던 빌바오 일대의 지저분한 강변을 정리하고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박물관과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수용하면서 단박에 힙한 바스크 도시로 만들었다.

도시 개발이나 건축을 공부하는 이들로부터 그 자자한 명성을 익히 들어왔다.


오픈 시간 직전이라 금방 들어갔다.

거의 대부분이 현대 작품들이었는데,

음….솔직히 말해서 그림이고 작품이고 하나도 눈에 안 들어오고 모르겠다.

마음이 좀 차분해져서 작품들을 봤어야 했는데 마음속이 바빴다.


몇몇 중년 여성 뻬레그리노를 만나고 어제 알베르게에서 소개받은 빌바오 공립 알베르게를 찾아갔다.

다운타운을 가로지르면서 반갑게도 중국 요릿집을 발견했는데 큰 기대를 안고 들어서니 스페인말 밖에 할 줄 모르는 중국계 스페인들이 모여서 밥을 먹다 말고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브레이크 타임이라고 나중에 오란다.


공립 알베르게는 찾았는데 아직 오픈 시간이 좀 남았었고 점심도 전이라 알베르게 앞에 있는 허름한 선술집 겸 식당에서 점심 세트 메뉴를 먹고 나서 비 맞으면서 알베르게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는데 몸이 맛이 가려고 한다.

아프면 안 된다고 다짐하며 정신줄을 다잡는다.

다행히 알베르게가 나쁘지 않다.

내일 일정도 느긋하게 잡고 좀 쉴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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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 외모의 구겐하임 외관이다.

다음날 아침 비가 그친 뒤 하늘이 맑게 개었을 때 찍은 사진이다.

저 외관에 사용한 자재가 모두 티타늄이라고 한다.

비싼 소재로 저렇게 큰 구조물을 둘렀으니 건축비가 꽤 들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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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시장 봐 온 걸로 대충 때우고 감기약 먹고 자려는데 헐, 약이 통째로 사라졌다.

각종 비상약과 밴드 등 모든 상비약을 지퍼백 하나에 담아왔는데 감쪽같이 세면 가방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제야 이틀 전쯤 마키나스에서 또 다른 이탈리아 인이 전화로 약봉지를 주웠다고 다른 이탈리아 인에게 물어보던 일이 생각났다.

약봉지가 아마도 내 것일 확률이 높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어떻게 내 세면 가방에 든 약봉지가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되게 된 걸까.

암튼 슬프게도 모든 비상약이 날아갔다.

약이 없으므로 이제는 절대로 아프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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