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시에스타와 도밍고

5.18 토 비 많이 옴

by 이프로

Gernika-Larrabetzu 16.36km


비가 온다.

많이, 계속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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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 아프다.

사실은 오래된 족부 질환인데 처음에는 족저근막염으로 알고 한방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었다.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걸은 적이 있었는데 후에 생긴 듯하다.

한방병원에서도 족저근막염으로 알고 치료를 해주었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통증이 없어지고 나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후에 잊을만하면 한 번씩 발바닥에 통증이 찾아오고 한번 아프면 며칠씩 이어졌다.

그렇게 아팠다가 낫다가를 반복하고 있는데 한방병원에서 발병 원인을 못 찾는 같아서 정형외과엘 갔는데 여기서도 병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아주 심하게 아프고 힘들었다면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라도 고쳤을 텐데 견딜 만큼 아프고 자주 아픈 건 아니라서 이제는 이렇게 질환을 달고 다닌다.

발이 다시 아프기 시작했는데 비까지 온다.

그래도 또 아침 식사 마치고는 배낭을 들쳐 메고 걷는다.


어제는 참 잘 잤다.

10시에 자서 5시 정도까지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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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에서 주는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다.

어제도 알베르게 아침을 먹었는데 확실히 아침을 배부르게 먹으니 잘 걸을 수 있고 휴식을 안 해도 점심때까지 걸을 수 있다.

비 때문에 대부분 순례객들은 라라베추까지 가서 멈췄다.

오늘은 한 번도 안 쉬고 걸었다.


유라시아 대륙 건너 지구의 반대편에서 길을 걸으며 생각한다.

그 옛날, 우리 선조들도 당연히 걸어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지체 높은 경상도 안동의 대감댁 자제가 한양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가거나, 나주 사는 아무개가 출세하여 큰 고을 전주를 가려해도 걸어서 이동했을 것이다.

ATM이 없으니 노잣돈과 기타 경비는 지니고 다녀야 했을 것이고, 고어텍스 미드컷 중등산화가 없으니 여분의 신발을 챙겨야 했을 것이며, 연간 강수량이 천미리가 넘는 나라이기 때문에 우비나 고어텍스 재킷 없이 걷다가 비가 쏟아지면 피할 곳을 찾거나 아니면 온전히 그냥 다 맞아내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장거리를 도보로 이동하는 이들은 깊은 숲 속 산적들에게는 손쉬운 먹잇감이고, 연약한 여자와 아이들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어서 60명이 모여야 함께 뭉쳐 고개를 넘는다는 '육십령'같은 고개는 전국에 퍼져 있었을 것이다.

까미노의 바르에 해당하는 국밥집이나 주막이 곳곳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허기진 배를 채우려면 휴대가 용이한 인절미나 주먹밥을 챙겨야 했을 텐데 그것도 삼복더위처럼 더운 날이나 한 겨울에는 쉽지 않았을 터이니 사람들의 이동은 상상 이상으로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여자 몸으로 심산유곡을 여행하며 박연 폭포 앞에서 멋진 시와 노래도 불러 젖혔다는 황진이를 생각해 본다.


라라베추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는데 우리가 도착한 이른 점심 무렵, 마을에서는 동네 축제로 비가 오는 가운데에도 시끌벅적했다.

알베르게 오픈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같이 걸은 일행들과 마을 광장 옆 바르에 들어가 맥주를 한잔씩 마셨는데 비가 잠시 멈추자 나팔과 북을 치는 축제 행렬과 마을 사람들이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우리는 모두 궁금했는데 바르에서도 마을 주민들 누구도 이게 무슨 축제인지 무슨 날인지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바스크 지역 사람들은 순박하고 착하다고 느꼈는데 외지인에게 낯을 가리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았다.

알베르게에 체크인하고 쉬려는데 폴란드 3인방이 내일이 도밍고(일요일)이니 가게 문 닫기 전에 시장을 봐 두라고 일러주었다.


하마터면 내일 간식과 비상식량을 못 챙길 뻔했는데 가게 문 닫는 시간 전에 알려줘서 모두들 상점으로 가서 과일과 바게트, 치즈와 햄, 음료수, 와인 등을 털어왔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도밍고와 시에스타 시간은 매복한 병사 같다.

잠시 방심하고 있으면 기습적으로 나타나 허를 찌른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스페인의 푸른 하늘에 마음을 빼앗겼다가, 혹은 들판에 만발한 아마폴라와 바람 따라 출렁이는 풀파도에 현혹되어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주변이 싸해지는 느낌이 들어 아차 하며 시계를 보면 모두가 문을 닫아걸고 잠을 자는 시에스타 시간이다. 뙤약볕 내리쬐는 거리에는 개도 안 지나다니고 행인이라고는 철없고 물정 모르는 외국인들 뿐이다.

느긋하게 일어난 일요일 아침도 허망하기는 마찬가지다.

대도시라면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업소들이 많이 있지만 시골 마을에서 일요일에 간단한 요기나 생필품 하나를 구하다가는 낭패감만 얻을 뿐이다.

유대인이 안식일 지키듯이 일요일에는 대개의 업소가 문을 닫는다.

낮에는 덥다고 자고 일요일에는 휴일이라고 문을 걸어 닫으니 '365일 연중무휴 진료'나 '24시간 오픈 사우나' '24시간 해장국' 등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투덜대며 지나간다.


오후 2시-4시 사이, 일요일 대비를 잘하면 까미노가 즐겁고 불평할 일이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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