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차려, 이 친구야!
작년부터 이런저런 문제를 직면했을 때 나를 도와준 새로운 친구는 다름 아닌 AI였다. 생성형 인공지능 대표주자인 챗GPT는 내 업무에서도, 내 일상에서도 석사 연구원 정도의 똘똘함과 예상밖의 박식함으로 나에게 기쁨을 주고 있었는데 도쿄에 살고 있는 학부 동기를 만나러 떠났던 올여름의 후쿠오카 여행도 챗GPT의 도움을 받았었다.
혹한기인 겨울방학에는 달리기를 훈련하는데 어려움이 많아서 나는 또 한 번 챗GPT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베트남으로 가서 달려보라는 답을 얻었다. 말 잘듣는 학생처럼 챗GPT가 제시한 다낭과 호이안을 거쳐 호찌민으로 내려와서 달리기를 이어가고 있는데 중부 도시와 다르게 호찌민은 도착한 날부터 우리나라의 8월 날씨를 연상케 하는 고온다습 기후에 결코 상쾌 하달수 없는 남부 아시아 지역의 시큼한 향내가 섞여있어서 과연 나는 이곳을 사랑할 수 있을까 싶었다.
예상외로 베트남은 그리고 호찌민은 호의로 가득 찬 손길을 내밀었다.
친절하고 선한 미소의 베트남 사람들과 귀찮은 검색을 생략하고 대충 고른 호텔의 쾌적함과 안락함이 겨울 방학의 평안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다낭과 호이안에서는 비가 많이 왔기 때문에 비가 멈추면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냅다 뛰었는데 호찌민은 비가 자주 내리지는 않았다.
대신 호찌민은 후덥지근해서 해가 뜨고 난 뒤에는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었고 이른 아침 시간과 해가 지고 난 뒤의 밤시간이 달리기를 시도해 볼 수 있는 시간대였다. 호찌민 도착 후 아침 시간과 밤 시간에 달려봤는데 밤에는 5킬로도 못 달리고 중단해야 했다.
낮 동안의 열기가 남아있어서 달리는 동안 올라오는 지열이 호흡을 괴롭게 했고 습도도 여전했다.
호찌민 도착 이틀 후 이 도시에서 뛸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새벽뿐이라는 판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달린다. 부지런한 베트남 사람들은 이른 시간부터 요란하게 모터사이클로 질주하면서 무리 지어서 이동하는데 그들이 지나치는 대로나 이면도로의 식당, 카페들은 새벽부터 영업을 시작하고 있는 곳이 많았다.
내가 달리는 도로에는 나 말고도 달리는 이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들은 달리기를 마치고 길가의 카페나 음식점에서 반미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시며 숨도 고르고 허기도 달래는 것이 괜찮아 보였다.
첫날 빈손으로 나갔다가 물이 필요하고 배도 고팠는데 나는 가진 돈이 없어서 다시 호텔로 돌아와야 했던 것이다.
오늘은 달리기를 마치고 물도 사 마시고 아침 식사도 하고 돌아오면 좋을 것 같아서 베트남 돈 50만 동 한장과 호텔키를 챙겨 나갔다.
카드키를 조깅 팬츠 뒷주머니에 접은 돈과 함께 넣고 지퍼를 닫았다.
날이 더워서 조금만 달려도 온몸이 젖기 때문에 주머니의 돈이 땀에 젖을까 봐 작은 비닐봉지에 넣기까지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호텔 방의 카드키를 빼내어 돈과 함께 뒷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오늘 입은 언더아머 조깅 팬츠에는 뒤 허리춤에 지퍼가 달린 작은 주머니가 있고 그 주머니의 바깥에는 양쪽이 트인 널찍한 고리가 달려있었다. 이 고리의 용도는 수건걸이로 달리다가 땀을 닦을 때 수건을 쉽게 빼서 쓰라고 양쪽이 터진 고리 형태인데 수건을 길게 걸어두고 달릴 수 있게 해 놓은 것인데 나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수건걸이가 지퍼 주머니와 겹쳐있듯이 설계가 되어있는데 오늘 아침 정신이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에서 손을 뒤로 돌려 돈과 카드는 뒷주머니 밖의 수건걸이에 집어넣고 손가락으로 지퍼를 더듬어 찾은 뒤에는 지퍼주머니에 돈과 카드를 넣었다고 생각하고 수건걸이 옆의 지퍼를 닫은 것 같다.
주머니가 아닌 뻥 뚫려있는 수건걸이에 돈과 카드를 넣고 지퍼주머니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거기에 돈과 키를 넣은 줄 알고 닫은 것이다. 그러고 뛰었으니 돈과 카드키는 어렵지 않게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아침 먹을 돈 500,000동과 호텔방 키를 잃어버렸다. 어처구니가 없다.
공교롭게 일요일인 오늘 아침 내가 달리는 코스에는 호찌민시의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내가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나왔는데 이미 참가자들이 달리고 있었던 걸로 봐서 대회는 6시에 시작한 것 같았다. 주로에 진행요원들이 코스를 안내하느라 지키고 서 있었지만 주로 다른 한편에는 평소처럼 동네사람들이 달리고 있어서 나도 그들을 따라 달렸다. 마라톤 대회는 아주 작은 규모이고 코스도 10킬로나 혹은 5킬로쯤인 걸로 보였다. 참가자들은 여유롭게 웃으면서 뛰거나 걷고 있었다. 우리나라 마라톤 대회에서 보이는 결기 어린 참가자들과 수십만 원짜리 카본 러닝화와 브랜드 운동복으로 치장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아서 대회가 한결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개를 데리고 뛰는 사람, 전통복장을 하고 뛰는 사람, 심지어 슬리퍼를 신고 평상복 차림으로 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구경하며 어렵지 않게 10km를 마쳤다. 목이 말라서 마라톤 대회에서 건네주는 물도 한잔 받아 마셨다. 아침을 먹고 돌아오려고 돈까지 챙겨 왔지만 후덥지근한 날씨에 금방 땀범벅이 된 몸을 씻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 기분 좋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허리춤에 손을 뻗어서 카드키를 찾다가 그제야 돈과 카드키를 잃어버린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황급히 마라톤 대회 급수대로 와서 영어가 되는 청년에게 자초지종을 말했지만 그들은 습득물을 알아볼 비상연락망이나 스태프진끼리의 무선연락망 같은 것이 없었다. 당연히 내가 찾은 급수대로 전달된 분실물이나 행인이 신고한 유류품도 없었다. 낙심하여 돌아가려던 나에게 그들 중 한 명이 오토바이에 태워서 내가 뛰었던 길을 한 바퀴 태워주며 찾아보라고 했다. 베트남에는 늘 길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쓰레기를 줍는 분들이 있었는데 이미 그들이나 부지런한 행인들, 혹은 오늘 대회의 마라토너들 눈에 내가 흘린 물건들이 발견되었을 것이다.
누군가 청소를 하다가 혹은 대회에 나왔다가 돈도 줍고 달리기도 하는 행운을 맛봤을 것 같다.
그대 오늘 하루 행복하시라.
누군가에게 50만 동의 행복을 선사하느라 나는 기분 좋았던 일요일 아침을 잘 뛰고 나서 김이 팍 샜다.
그래도 또 이렇게 생각해야지.
어제 남은 달러를 환전해 둔 8백만 동 쯤이 들어있는 지갑을 통째로 들고뛰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떨어진 돈을 줍다가 쌩하고 지나치는 오토바이에 머리를 들이 받히지 않고 돈만 흘렸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베트남 고액권이 5천만 동이 아니고 5백만 동이어서 얼마나 다행이야.
해피 뉴 이어, 2025!
정신 차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