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일로 하루를 소진할 수 있다!
교직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교수나 교사를 볼 때 가장 부러워하는 것 중 하나는 방학이다. 아마 내가 교수가 아니었더라면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에, 두 달 이상을 출근하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시간을 쓰는데 월급이 지급된다니 개꿀 아닌가!
음... 방학 숙제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선생에게도 있기 마련이다. 남들 돈 버는 걸 보면 참 쉽게 사는구나,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당사자와 마주 앉아 각자의 밥벌이 고충을 들어보면 역시 세상에 공짜밥은 없구나 라는 생각 또한 들기 마련이다. 교수 역시 방학은 꿀 같은 시간이지만 학생들 출석과 성적을 내고 이의신청을 처리한 후 다음 학기 시간표를 짜면서 강의준비를 하거나 승진, 재임용 등에 필요한 논문이나 학회 발표, 저서 출간 등 쉽지 않은 일정을 감당하다 보면 하루가 짧은 경우도 빈번하다.
그래도 출근은 안 하잖아!
그래, 맞다. 평일인데도 출근 안 하고 하루 종일 뒹굴거리며 노는 날도 있다. 방학이지 않은가!
방학을 보내는 여러 가지 방법 중 내가 사랑하는 하나는 하루를 오로지 달리기와 콜린 맥컬로의 <마스터즈 오브 로마> 시리즈를 읽는 것으로만 사용하는 것이다.
요즘처럼 습도 높고 더운 여름이면 새벽에 일어나서 잠도 깨지 않은 몰골로 우유와 커피를 마시며 달달한 빵이나 케이크를 우적우적 씹어 넘긴다. 물도 벌컥벌컥 500미리쯤 마셔준다. 에너지와 수분을 몸 안에 집어넣는 것이다. 그리고, 여명이 밝아오기 전 밖으로 나가 달린다. 기세 좋게 나왔지만 무덥고 습해서 10킬로쯤만에 돌아온다. 겨우 한 시간 달리고 멈췄지만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다. 여름에 굳이 무리하지 않는 대신 매일 달려서 주당 50-60km 정도 소화한다. 달리기로 하루를 시작하면 더운 여름도 상쾌하게 시작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이제 달리기는 빠뜨리면 괴로운 일상이 되어버려서 어디를 가든, 어떤 상황에 있든 일주일에 서너 번을 달려주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견디기가 어렵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상쾌하게 달리면서 하루 계획을 정리하고 땀을 빼고 나면 열심히 살고 있다는 자기 최면도 들고 또 이렇게 혹서기에도 기본량을 채워두어야 가을에 있을 풀코스 대회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게 된다.
돌아와서 몸을 씻고 나서는 이제 하루 종일 '카이사르'를 붙들고 뒹굴거린다.
콜린 맥컬로의 시리즈 중 이제 <카이사르의 여자들>을 읽고 있는데 그동안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의 전성시대를 읽으며 서서히 카이사르를 위한 스토리를 빌드업해왔던 시리즈는 이제 히스파니아에서 보조 장교 역할 근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가 정적들의 아내를 후리고, 또 한편으로는 큰 빚을 지면서까지 로마 시민들을 위한 공연과 경기를 제공하고 다니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가는 흥미진진한 대목이어서 흡인력이 대단하다. 맥컬로의 로마 시리즈는 박경리의 <토지>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합친 것만큼, 혹은 그 이상일 정도로 책의 양이 방대하다. 기원전부터 시작된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 기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등장하는 인물도 어마어마한데 당시 로마인들의 귀족 이름이 몇 가지로 한정적이어서 중요한 인물의 이름도 계속 반복되어 사용된다. 그래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읽지 않으면 헷갈리기 십상이고 몇 안 되는 남자 이름보다도 더 가짓수가 적은 여자 이름은 저자가 친절하게 등장할 때마다 설명을 다시 해주기는 하지만 읽던 책을 다시 앞으로 넘겨가며 이 인물과 저 인물이 어떤 사이였더라 하고 되새김질해야 할 때도 많다.
당시 지중해 일대를 넘어 동방까지 속주로 삼고 있던 로마는 비티니아, 파르티아, 킬리키아, 시리아, 알렉산드리아 등 동부 지역과 알프스 북쪽과 서쪽의 갈리아 지역과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의 히스파니아 등 로마 문명권 전 지역의 왕국과 야만족 지역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어서 로마 시절의 옛 지명과 위치를 파악하느라 저자가 책 중간중간에 삽입해 준 지도를 펼쳐두고 지정학 공부도 해가면서 읽어야 한다. 덕분에 책을 읽는 속도가 더디게 나갈 때도 있지만 그 또한 이 책이 주는 재미이다.
저녁 무렵이면 거의 매일 달리기를 하느라 알이 배기고 뭉쳐있는 근육 여기저기를 폼롤러와 마사지기를 이용해서 풀어준다. 집중해서 볼 필요없는 뉴스나 유튜브 콘텐츠를 틀어놓고 큰 근육부터 시작해서 작은 근육 순서로 살살 달래가며 풀어주는 것은 중요하다. 달리기 경험이 일천할 때는 달리기를 마친 후 얼음 마사지를 하거나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과정을 생략해버려서 무릎이나 발목에 염증이 생기고 대회에서 쥐가 나서 고생을 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다. 아직도 가끔 빼먹고 넘어가는 날이 있지만 여유를 갖고 30분 이상 충분히 근육 곳곳을 풀어주고 난 다음은 확실히 몸이 부드러워 진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제 젊은 나이가 아니어서 정성스럽게 몸을 사용해야 부상을 방지하고 훈련도 잘 할 수 있다.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방학 중 하루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달리기로 시작하여 밤늦은 시간까지 로마 공부를 하다가 잠에 들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뿌듯하고 행복하다. 로마와 달리기, 이 두 가지를 합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게 바로 카이사르이다. 머리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몸도 날렵했던 카이사르는 젊은 초급 장교시절 전쟁에 사용할 군선을 수십 척 준비해오라는 명령을 받고 로마에서 동방의 비티니아까지 나르듯 달려가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는데 당시 로마군 병사는 30kg 이상의 군장을 지고 하루 50km 이상을 주파하는 것이 평균적이었다. 그를 따르던 노예와 수행원들을 쫓아오도록 하고 카이사르는 지금의 불가리아, 그리스 등 산간지역을 하루에 80km 이상씩 이동해서 수개월이 걸려야 마땅한 업무를 빠른 속도로 감당해 냈다. 지금으로 치면 1,000 km가 넘는 트레일러닝 코스를 고어텍스나 비브람 러닝화 없이 군장을 진 몸으로 완수해 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