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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류 Oct 13. 2024

나는 왜 쓰는가

영화 '룩백'을 보고 나서

학교가 끝나자마자 버스를 타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매표소에서 특전에 대해 물었지만 특전인 스토리보드북은 이미 다 나간 지 오래라고 했다. 힘없는 발걸음을 옮겨 상영관으로 향했다. 자그마한 상영관 안에는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사람도 몇 없었다. 일행끼리 속닥거리는 소리, 팝콘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유독 귀에 크게 들려왔다. 자리는 중앙에 가까워 스크린이 한눈에 아주 잘 들어오는 명당이었다. 그러나 팝콘도 없이 혼자 덜렁 앉아있는 나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을 건네자, 여러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숨이 나왔다. 그때, 잡생각을 차단하듯 상영관의 불이 꺼졌다. 영화의 시작이었다. 




사실 러닝타임이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영화에 만 오천 원에 가까운 돈을 지불하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나 또한 상영 리스트를 보고 흥미를 표했는데도 쉬이 관람을 결정할 수 없었다. 같은 돈으로 더 길고 재밌는 영화를 볼 수 있는데 굳이? 보고 싶은 것보다도 가성비를 우선하게 된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게 내가 처한 상황이었다. 사실 이전에도 룩백을 보려던 것을 짧은 러닝타임에 주춤하여 다른 영화를 골라 관람했다. 그럼에도 내가 다시 예매에 도전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요즘의 애니메이션 영화가 궁금하다던가, 해당 영화의 줄거리를 보고 창작자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싶다던가.


... 그러한 이유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쉽게도 나열한 것 중 내가 관람을 결정하게 한 요소는 단 하나도 없다. 내 의도는 어쩌면 불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친구들이 한 번쯤 보고 싶다고 한 영화였고, 교수님께서 창작자라면 한 번쯤은 볼 만하다고 예고편까지 보여주시며 추천하신 영화였다. 우습게도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채로 넘길 생각까지 하다가 이러한 외부의 자극에 의해 덜컥 예매표를 손에 쥐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영화에 대한 호기심보다도 다른 이보다 ‘먼저’ 경험을 했다는 것으로 으스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주위의 누구도 아직 관람을 하지 않아 공감대조차 형성할 수 없는 환경인데, 그렇지 않고서야 일주일 중 가장 바쁜 날에 굳이 심야 영화를 예매하면서까지 헐레벌떡 움직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스크린이 완전히 검게 변한 후에야 나는 짐을 챙길 수 있었다. 깔깔 웃거나 눈물을 흘릴 만큼 감정을 흔드는 장면은 없었다. 내게는 크게 여운이 남는 작품도 아니었다. 두 번 볼 생각이 있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것이고, 명확한 감상평보다는 알 수 없는 먹먹함과 의문이 남는 짧은 시간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중고장터에서 봐둔 프리미엄가의 특전을 찜 리스트에서 삭제했다. 누군가에게 명확한 사유를 대며 추천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한 시간이라는 시간과 만 원이 넘는 돈을 투자하면서 본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참으로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이 목구멍을 넘어와 내보내 달라고 입술 안쪽을 두드렸다.


후기들을 흝어보았다. 누군가는 이 영화가 창작자에게 보내는 찬가라고도 했다. 나는 그 의견에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한 채로 사색에 잠겼다. 창작자에게 보내는 찬사라,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대단한 감정을 느끼지 못한 나는 창작자로서 실격인 것일까?


그 외에도 몇 부분에 오역이 있었다고도 한 글을 보았다. 영화를 볼 당시에 나도 그것이 오역임을 은연중에 느꼈는데, 확실해지자 조금의 아쉬움이 고개를 들었다. 만일 오역이 없었다면 다른 이들보다 더 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을까. 어쩐지 오역을 초월해서라도 감동을 느낀 사람들에게 질투가 나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왠지 내가 생각이 깊지 않은 사람인 것 같다는 패배감이 짙게 남았다. 




“너는 왜 만화를 그려?”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을 고르라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극 중에서는 왜 ‘만화’를 그리냐고 묻지만 결국 모든 창작자를 관통하는 질문일 것이다. ‘어째서 창작을 하는가’, ‘어째서 창작을 지속하는가’.

어째서 우리는, 넘어지고 괴로워하면서도 창작을, 예술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가.

사실 쉽게 답을 내릴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이미 명쾌하게 답을 내린 사람도 끝없이 고민해야 하는 질문이며, 실제 작중에서도 이에 대해 대사를 내뱉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고 있다. 설령 그것이 창작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말이다.  


나에게 왜 글을 쓰느냐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었다’. 참으로 볼품없는 대답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예술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삶의 목적인 자들이 있다. 내가 그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런 사람들은 선택받은 사람이니까.

선택받지 못한 범재라고 해서 살아가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나는 그저 혈액이 돌고 숨을 쉬듯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우리를 구성하는 예술에 한 발짝 걸치는 것은, 조금 더 풍요롭게 살고 싶은 나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해.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야.” 

결국 낭만과 사랑을 묘사하는 예술은 삶의 목적을 향한 이정표이자 수단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예술이 없다면 건조해질 것이고, 건조한 것은 결국 생명을 잃고 말라비틀어진다. 그렇다면 그것을 과연 삶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삶의 답을 찾고자 그 목적 속에 직접적으로 뛰어드는 것은 무모하나, 나는 그래도 나의 도전을 감히 아름답다고 말하겠다. 내 무한한 도전에 끝이 보일 때쯤이면, ‘왜 창작을 하는지’에 대한 답을 명확히 내릴 수 있을 때쯤이면, 나 또한 성장해 있겠지. 누군가의 성장에 등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날까지 나는 궁리하는 것을, 생산하는 것을 멈추지 않겠다고 조심스럽게 글로써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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